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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세이/홍루몽]시공-종족 뛰어넘은 각색 눈길

입력 | 1997-01-29 20:19:00


[조성기 편저/민음사 펴냄] 고전이 주는 감동은 시공을 초월한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종족성마저 초월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우리는 일찍이 헤겔이 동양의 대표적 고전인 「논어」를 세간의 한담 정도로 과소평가한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문학작품은 예외인가. 실망스럽겠지만 「삼국지」나 「수호전」같은 고전소설에 대해 서구인들은 결코 재미있어 하지도 감동적이지도 않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와 있다. 수많은 등장인물, 비완결적인 구조, 현실과 초현실의 흐릿한 경계 때문에 서구의 독자들은 감동은커녕 낯설고 당혹스러운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최근까지 서구 동양학자들의 지론이었다. 작가 조성기가 새롭게 각색한 「홍루몽」을 읽으면서 필자가 우선 염두에 두었던 것은 바로 앞서의 문제의식과 상관된, 이미 정서적으로 서구화된 우리가 중국의 고전 소설을 얼마나 만끽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아울러 역량있는 작가의 필력이 이 의구심을 얼마만큼 해소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었다. 솔직히 오늘의 우리는 장소팔 고춘자 식의 만담보다 자니 카슨 식의 토크쇼에 더 익숙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우리가 「삼국지」를 위시한 사대기서를 능가했다고까지 평가되는 고전 소설 중의 백미인 「홍루몽」을 액면그대로의 감동으로 읽을 수 있을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홍루몽」은 중국의 대표적 애정소설이다. 대귀족 가문의 금지옥엽인 「가보옥」과 그를 둘러싼 절세의 여인군상과의 애증과 비환(悲歡), 궁극적으로 그들이 그려내는 사랑의 비극은 (가문의 몰락과 같은 궤도 위에 놓이며) 장구한 중국 봉건사회의 쇠망이라는 역사적 현실에 덧포개진다. 바로 이 중층의 의미구조로 인해 「홍루몽」은 단순한 애정소설의 경지를 훨씬 뛰어넘는 침통한 문제작으로서 상찬되어온 것이다. 그러나 「홍루몽」에서의 침통한 깨달음의 내용은 제목이 시사하듯이 모든 삶이 꿈이고 꿈이 삶인 것과 같은 이른바 「존재의 가벼움」이다. 조성기의 「홍루몽」은 이러한 깨달음을 오늘 우리의 부박한 시대정서속에서 구현하고자 한다. 그는 침통함보다 오히려 간결하고 경쾌한 품격 속에서 존재의 가벼움을 체감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조성기의 「홍루몽」을 읽는 순간 우리는 이 책이 번안이 아님을 알면서도 장편 고전의 시공적 무게가 주는 거리감이 급속히 소실됨을 느끼며 읽는 재미에 빠져들게 된다. 실로 저자 조설근이 그랬던 것처럼 작가 조성기는 「진짜 홍루몽을 가짜처럼, 가짜 홍루몽을 진짜 처럼」 각색하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일까. 정 재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