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역사가들은 인간의 정치활동에 주목하여 왔다. 전쟁, 정치적 혁명과 권력 투쟁, 통치행위의 전면에 나타나는 영웅들에 의해 세계사와 민족사의 방향이 결정된다고 여겨져 온 것이다. 그러나 역사 자체의 진보와 그에 따른 역사해석의 발전에 따라 피동적인 존재에 머물던 민중의 역할이 발견되고 있다. 그렇지만 영웅이 역사를 이끌든, 민중이 위인을 만들어내든 또는 민중 스스로 역사를 창조하든 인간이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역사를 바꾼 씨앗 5가지」는 근대에 들어 인류와 밀접한 관련을 맺어 온 키니네 설탕 차 면화 감자 등 다섯가지 식물의 역사적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우선 필자는 이들 식물이 인간의 삶에 관여하게 된 연유와 과정을 꼼꼼히 묘사한 점에 흥미를 느꼈다. 그보다 더 관심을 끄는 것은 이 식물들이 조역이나 단역을 뛰어넘어 역사발전의 동인(動因)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이 책은 인간이 스스로 역사를 만드는 대신 인간 이외의 요인들, 즉 몇가지 식물에 의해 인류 역사가 휘둘려 온 것처럼 그리고 있다. 그 식물들의 씨앗 속에 인류사의 전개방향이 간직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후추가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을 이끈 것이다. 후추라는 향신료가 없었다면 그것을 얻기 위한 대탐험이 없었을 터이고 따라서 아메리카는 발견되지 않았으리라는 식이다. 또 말라리아약으로 쓰이게 된 키니네가 있었으므로 백인들이 열대지역을 개척하여 거대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고 합성화학도 발달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전에도 아날학파는 인간의 정치행위보다 의식주 생활이나 그 재료들 따위가 인간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쳐 왔다는 주장을 펼쳐 왔으며 많은 역사적 증거들로 그러한 가설을 입증해 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책의 저자가 후추의 추구가 곧 아메리카를 발견하게 되고 키니네의 사용이 곧 아프리카 식민지를 건설하게 된다는 등과 같은 단선적 결정론적으로 역사를 해석하지는 않는다. 자동차 텔레비전 컴퓨터 등 인간 이외의 요인들이 현대인의 삶을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은 몇세기 동안 다섯 가지 씨앗이 역사 전개에서 큰 역할을 해온 것과 마찬가지로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다섯 가지 식물을 인류사에 끌어들인 것이 인간이듯이 그 발명품들을 만들어내 활용하는 것 역시 인간이다. 더 중요한 점은 식물이든, 인간의 발명품이든 그것들이 인간의 삶과 역사에서 의미를 가지는 까닭은 그것들을 수용할 수 있는 사회와 문명이 존재하기 때문인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은 역사 해석에 대한 또다른 시각을 던져준다는 면에서 흥미롭다. 황상익(서울대의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