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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심칼럼]「한보」를 넘어서

입력 | 1997-02-28 20:24:00


만나는 사람마다 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질타하다가 결론은 나라 걱정으로 끝맺는다. 더 이상 기대할만한 것도 없어보이는 정부는 그렇다 치고,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의 근본이 무너지지 않을까 두렵다는 불안이다. 욕 한마디 보태고 비난만 하고 있기에는 나라사정이 너무 급하다. 대통령은 권위를 잃고 통치력은 구심점을 잃었다. 믿을 것은 이제 국민들 자신밖에 없다. ▼ 대통령의 사죄와 새 출발 ▼ 金泳三(김영삼)대통령은 취임 4주년 대국민담화에서 한보사건과 아들 賢哲(현철)씨 문제를 침통하게 사죄하고 이 비상시국으로 나라가 난파선이 돼서는 안되지 않겠느냐고 호소했다. 한보사건과 현철씨에 관한 세간의 넘치는 의혹들을 죄송하다는 말 몇마디로 덮고 새 출발하자고 해서 될 일은 아니다. 밝힐 것은 밝히고 벌줄 것은 벌을 줘야 한다. 그것을 피해가려 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나라 전체가 일제히 손을 놓고 「한보」수렁에서 기약도 없이 헤매고 있을 수는 없다. 의혹은 의혹대로 벗기고 나라는 나라대로 살려야 한다. 진상을 규명하고 의혹을 벗기는 일도 그렇게 해서 나라를 살리자는 것이지, 나라를 한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아놓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언제까지 한보 먹구름에 뒤덮여 갈 길을 잃고 표류할 수는 없다. 당장 경제가 추락하고 나라 체면이 아시아태평양지역 G6에도 끼지 못할만큼 전락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뽐내던 것이 엊그제인데 이젠 아시아의 4룡(龍)에서도 탈락했다. 북한 노동당 黃長燁(황장엽)비서는 그가 버린 북한이 사회주의국가가 아니라 봉건국가라고 비난했다. 그에 화답이나 하듯 우리의 집권여당 李洪九(이홍구)대표는 우리 정치현실을 붕당(朋黨)정치라고 규정했다. 趙淳(조순)서울시장은 더 직설적으로 조선조 말기의 세도(勢道)정치에 비유했다. 우리 사회 최고위급 지도층이 남한도 전근대적이기는 매한가지라고 자조(自嘲)한 셈이 됐다. 나라가 왜 이 지경이 됐는가. 세계 12위의 교역량을 자랑하며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뒀다고 떠들썩하던 나라가 왜 순식간에 밖으로는 용 아닌 지렁이로, 안으로는 전근대사회에까지 비유되는 참담한 처지로 전락했는가. 이 무상한 유전(流轉)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당사자가 정부당국이어야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오만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가 권력놀음에 도취해 경제의 발목을 잡고 사회의 발목을 잡아 나라를 수렁에 빠뜨린 것이다. 이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새로운 각오로 기강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 정부가 하지 못하면 국민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스스로 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국민들의 이 간절한 자생(自生)의지에 찬물만 끼얹지 않으면 된다. 국민들이 대통령의 사과와 다짐을 일단 접어두고 청와대 비서실 인사에 이어질 당정개편을 주시하는 것도 국민들의 나라 걱정에 대통령이 얼마나 부응할 수 있을지 가늠해 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 국민을 援軍으로 여겨야 ▼ 대통령은 패거리를 만들고 끼리끼리 「쪽지정보」를 주고 받으며 뒤로 사익(私益)이나 챙기는 무리들을 물리치고, 더 이상 「고독한 결단」을 자랑하지 않는 것이 좋다. 먼저 국민에게 묻고 권력이 모든 것을 틀어쥐겠다는 개발시대의 관행을 버려야 한다. 시장과 사회의 민주적 경쟁과 자율을 존중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한보사태는 개발시대의 유물인 권위주의와 관료주의가 만들어낸 정경유착 구조의 사생아다. 그것을 청산해야 한다. 대통령의 사죄는 선의로 해석하자면 때늦게 그 청산의 발을 뗀 것에 불과하다. 실의를 털고 일어서는 국민들을 믿고 밀어주면 된다. 그것이 진정 「한보」를 넘는 길이다. 김종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