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양 사상이라고 하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르다」는 속담처럼 우리 생활속에는 아직도 음양의 모음조화가 시퍼렇게 살아 숨쉬고 있다. 같은 말이라고 해도 「어」와 「아」처럼 모음(母音)의 음양(陰陽)에 따라서 미묘한 변화가 일어난다. 「껄껄」웃는 것과 「깔깔」웃는 의성어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지만 「거짓말」과 「가짓말」처럼 보통명사 가운데서도 그런 차이가 생겨난다. 그래서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늙다」라고 말하고 물건이 오래 되면 「낡다」라고 한다. 한국말의 특성인 그 모음조화의 음양체계를 확대해 가면 「너」와 「나」의 인칭(人稱)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 지상에는 3천종이나 되는 많은 말들이 있다고 하지만 아마 우리나라의 「너」와 「나」라는 말처럼 음과 양의 모음 음색(음색)하나로 인칭이 바뀌는 경우는 흔치 않을 것 같다. 영어의 「you」와 「I」를 놓고 비교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그것들은 서로 닮은 데라고는 한구석도 찾아볼 수 없다. 글자로쓸 때에도 일인칭 I는 you와는 달리 대문자로 쓰이는 특권을 누린다. ▼ 절묘한 음양의 조화 ▼ 언어학에서는 「너」와 「나」같은 말들을 전이사(轉移詞)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언어의 본질이라고 한다. 우리는 자기를 「나」라고 부르지만 상대방이 부를 때에는 「너」가 된다. 우리는 남을 부를 때 「너」라고 하지만 당사자에서 보면 「너」가 아니라 「나」다. 이렇게 나와 너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주체에 따라서 수시로 넘나드는 말이다. 그래서 등잔밑이 어둡다고 아이들이 이 세상에 나와서 제일 늦게 배우는 말이 바로 「나」라는 말이라고 한다. 유치원 선생이 『이 그림 누가 그렸어요』라고 물을 때 『내가 그렸어요』가 아니라 『너가 그렸어요』라고 대답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다. 선생님이 자기를 「너」라고 부르니까 자기 자신도 그대로 따라서 「너」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을 언어학적으로 말한다면 「너」와 「나」의 전이사를 분간할 줄 알게 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말들은 결국 나의 언어와 너의 언어로 양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똑같은 개념, 똑같은 행동을 두고서도 말하는 주체에 따라서 그 말이 음양으로 달라진다. 내가 무엇을 주장하는 것은 「당당한 것」이지만 너가 그렇게 주장할 때에는 「독단」인 것이다. 내가 결단을 늦추는 것은 「신중한 것」이요, 너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우유부단」인 것이다. 나의 지혜는 「슬기로운 것」이고 너의 지혜는 「교활」이요, 「꾀」인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폭로는 고발이요, 양심선언이고 너의 폭로는 음해요, 모략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어질다」와 「바보」는 뜻의 차이가 아니라 그 말을 사용하는 발화자(發話者)의 차이를 나타내는 말이다. ▼ 대립아닌 相生 의미 ▼ 놀라운 것은 너와 나만이 아니라 한자말로 된 여(與)와 야(野)역시 절묘한 음양 대응의 모음조화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어 해 다르고 아 해 다르다고 할 때의 「어」와 「아」에 점하나씩만 찍어주면 여가 되고 야가 된다. 우연치고는 너무나도 절묘하고 익살맞은 우연이 아닌가. 요즘 연일 시끄러운 국회의 여야의원들의 발언을 듣고 있으면 새삼스럽게 「어」와 「아」의 차이, 「나」와 「너」의 차이, 그리고 「여」와 「야」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사람들은 경제가, 정치가 그리고 사회가 어려워지고 있다고 한탄한다. 그러나 정말 지금 우리에게 닥쳐온 문제는 문화의 어려움인 것이다. 세계의 어떤 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 모음조화의 체계를 살릴 수 있다면, 나는 너로 너는 나로 끝없이 바뀌는 한국말의 절묘한 전이사를 익힐 수만 있다면, 그리고 모든 대립은 음과 양의 경우처럼 대립이 아니라 조화와 상생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노와 사, 여와 야 그리고 모든 잘못은 정부와 너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달력위의 3월처럼 새봄을 맞게 될 것이다. 이어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