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예기자] 2월25일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서울지법 서부지원 판사로 임용된 이숙연씨(29)가 걸어온 길은 새옹지마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회사에서 해고된 뒤 복직을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해고무효확인 소송을 낸 것이 그를 여판사로 만든 계기였다. 어려서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법조인이 된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 훌륭한 엔지니어가 꿈이었다. 87년 서울 여의도고를 졸업하고 포항공대 전체수석으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전공인 산업공학은 적성에도 맞았다. 91년 대학을 졸업, 포철에 입사했다. 생산관리부에 배치받아 원료와 생산비용을 절감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6월 회사로부터 해고조치를 당했다. 이유는 회사의 허락없이 가두집회에 참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해 4월은 명지대생 강경대군이 전경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사건으로 온나라가 시끄러웠고 거리에서는 연일 시위가 끊이지 않을 때였다. 이씨는 거리를 지나다 우연히 시위대에 합류하게 됐고 회사가 이를 문제삼은 것. 『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순순히 시위에 참석한 경위를 설명했는데 해고를 하더라고요. 엔지니어로서의 꿈을 그런 식으로 접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그해 10월 소송을 냈습니다. 부모님께서 소송에 반대하고 돈도 없었기 때문에 노동법 책을 사 읽으면서 혼자서 소장을 썼습니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여러번 들었지요. 그러나 회사측의 인신공격이 저를 끝까지 싸우게 했습니다』 1, 2심에서 이기고 대법원에서 승소판결을 확정받을 때까지 2년이 걸렸다. 법 모르고 힘없는 사람들의 설움이 어떤 것인지 법정투쟁과정에서 뼈저리게 체험했다. 그래서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역할자로서의 법조인이 될 것을 생각했고 본격적인 사법고시 준비를 위해 93년 고려대 법대에 편입했다. 매일 10시간 이상을 공부에 매달렸고 이듬해 10월 사시에 합격했다. 『엔지니어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제가 왜 법조인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평생 잊지 않을 겁니다. 저 자신 법의 도움을 받은만큼 봉사하는 마음으로 남들에게도 법의 도움을 주어야겠지요』 그는 연수원 동기생 가운데서 「반쪽」을 찾아 올해 부부판사가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