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필요도 없었고 알 수도 없는 성역(聖域)」. 한보그룹 鄭泰守(정태수)총회장에게 매달 수억원에서 수십억원씩 비자금을 만들어준 자금담당 임직원들에게 정총회장의 비자금 사용처는 성역이었다. 정총회장의 비자금 조성지시 역시 임직원들에게 「절대명령」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들어 갖다 바쳐야 했다고 그들은 검찰조사에서 밝혔다. 그들은 그때마다 심한 자괴감을 느끼며 고뇌했다는 것. 비자금 조성의 최고 책임자인 金鍾國(김종국)전한보그룹 재정본부장은 검찰에서 『정총회장이 지시해서 비자금을 못 만들어 낸 적은 없다. 다른 자금집행은 미루더라도 총회장이 요구하는 현금은 이상없이 만들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짐작하기로 총회장이 회사공금으로 빼간 총액이 2천억원은 된다』며 『가끔 총회장에게 「어디에 쓸 거냐」고 물으면 총회장은 「네가 무엇 때문에 알려고 그래」라며 면박을 주었다』고 말했다. 『꼬치꼬치 캐묻다간 그날짜로 사표를 내거나 파면당해야 했다』는 그는 『사용처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알 수도 없었다. 그것은 총회장의 성역이었다』고 고백했다. 비자금 조성과 전달의 실무를 맡았던 ㈜한보 재정부 P과장은 「비자금 하수인」으로서의 고뇌와 비애를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은행에서 현금을 빼 회계장부에 허위기재한 뒤 2억, 3억원씩 담은 마대자루를 메고 총회장실로 갔는데 비서실 여직원이 그 모습을 보고 실소를 터뜨려 창피당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회사 직원으로서 어쩔 수 없이 시키는 일을 했지만 금융권에서 힘들게 끌어모은 돈을 그렇게 빼낼 때 정말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그렇게 돈을 빼내지만 않았어도 부도는 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결국 정총회장은 무리한 비자금 조성지시로 국민은 물론 자신의 심복들마저 울린 셈이다. 〈이수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