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비서는 단순한 귀순자가 아니다. 귀순이 아니라 망명이다. 그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를 수정한 형태로 고수하면서 주체사상가로서 서울에 온다고 봐야 한다. 그의 사상은 시장경제와 사회주의를 결합한 수정주의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수정주의는 「우리식 사회주의」의 고수를 근간으로 하는 김정일의 「붉은기 사상」노선이나 군부강경파의 그것과 다르다. 그는 이념면에서 북한 개방파노선의 수정된 주체사상을 만들었다. 96년7월 그가 한국측 김모여인에게 망명을 타진했을 때 김여인은 『선생님이 망명하시면 북한의 개혁세력이 모두 죽는다』며 만류했다는 얘기가 있다. 동아일보가 독점입수, 「신동아」(97년4월호)에 전재한 황비서의 논문 「현시대와 당면한 역사적 과제」는 북한 개방파논리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는 마르크스 유물사관의 기본틀 속에서 사고하면서도 시장형 사회주의 이념을 구성하고 있다. ▼ 침체탈출 유일한 길 ▼ 그는 오늘의 북한사회가 사회주의가 아니라 봉건체제라고 단정한다. 『왕의 아들은 말도 못하는 어린애라도 왕의 지위를 차지했으며 비현실적인 종교적 교리와 신화에 대한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신앙이 강요됐으며 정통에 대한 사소한 부정도 이단자 배신자의 행위로 극형에 처한다』 이 논문은 개방파 논리의 기본을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긍정위에 세우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는 모두 나쁘다고 전면부정하던 기왕의 교조적 사회주의와 사뭇 다르다. 그는 자본가계급이 생산력을 크게 발전시키고 경제관리를 합리화하는데 기여한 장점을 예찬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그는 『봉건사회에 비해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을 보다 현실적이며 이성적 존재로 발전시키는데 이바지한 점』도 인정한다. 그는 남북간 체제경쟁에서 북한이 패배한 원인을 아이로니컬하게도 유물사관적으로 잘 인식하고 있다. 그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장점이다. 과거의 사회주의가 상업의 역할을 잘못 인식했다는 그의 지적은 흥미롭다. 특히 『시장은 인간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결합시켜주는 장소』라는 그의 시장예찬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인간중심의 주체사상에서 인간의 특징인 자주성과 창조성이 시장을 통해서만 결합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 양극 통합 새로운 시도 ▼ 자본주의 시장의 장점에 대한 그의 인식은 보다 깊은 이론적 근거로서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에 대한 비판에 기초해 있다. 노동가치설을 맹종한 나머지 힘들고 비능률적인 육체노동에 대해서는 많은 보수를 지불하고 기계를 통한 능률적 노동이나 관리노동 정신노동을 낮게 평가했기 때문에 북한경제는 기계화를 지연시키고 합리화 능률화를 게을리했다는 것이다. 북한에는 생산의 경제학은 있으나 소비의 인식이 없고 정치사상동원만 강조됐을 뿐 경제관리, 즉 경영학이 없었다는 것이다. 『지난 시기 사회주의 경제가 침체에 빠지게 된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바로 가치평가법칙을 무시한 데 있다』는 그의 지적은 시장시스템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다. 그는 이처럼 구소련이 붕괴한 원인도 그 체제내에 있다고 통렬히 비판한다. 물론 그는 자본주의의 전면적 수용이 아니라 『인민정권이 계획경제와 시장경제를 배합하여 운영할 수 있다』는 시장적 사회주의에 머물고 있다. 이처럼 정반대의 양극을 통합하는 것이 그의 개방파 변증법이다. 황비서의 망명에 대해 서방언론은 소련에서 마르크스가 망명한 격이라고 했다. 그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의 망명은 구소련에서 고르바초프가, 또는 중국에서 등소평이 망명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일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