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이 켜진다. 갑자기 관람객을 둘러싸는 거울. 거울을 통해 비쳐진 수천개의 화면이 일제히 같은 장면을 동시상영하는 다면체공간을 펼친다. 그 곳에서 관람객은 화면속 주인공과 함께 어두운 골목을 걷는다. 후미진 구석에서 마주친 섹시한 여자. 머리 속에 가득 떠오르는 성적인 환상들. 그녀를 품고 싶은 욕망이 포르노화면으로 떠오른다. 자위행위, 간음, 애무…. 위험한 상상은 그녀 남편이 갑자기 닥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멈춰진다. 현실을 막아서는 성도덕, 성의 억압들. 9∼15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다갤러리(02―725―6751)에서 열리는 애니메이션 그룹 「달」의 전시회중 「빨강 극장」의 한장면이다. 「달」은 컴퓨터애니메이터 이성강씨를 비롯, 프로그래머 만화가 화가 영화제작자 등 6명이 모여 만든 그룹. 이들은 『컴퓨터가 상업적 정보이용으로 사막화되는데 반대한다』며 「컴퓨터속의 인간적 예술화」를 기치로 내걸고 지난해 출범했다. 컴퓨터애니메이션과 영상기술을 통해 일종의 실험 설치미술인 「사이버 아트」를 추구한다. 『우리 작품은 명확한 주제의식과 그림자체의 작품성이 있어 단순한 만화영화와 구분된다』는 것이 기획자 이성강씨의 주장. 6개월의 작업끝에 내놓은 첫 전시회의 주제는 「섹스」로 잡았다. 가장 원초적인 본능을 통한 인간탐구가 목적. 여성에 대한 억압, 억눌린 성의식에 의한 내적분열 등을 집중적으로 파헤쳤다. 「빨강극장」을 비롯한 애니메이션 5편과 가상화랑, 가상조각들이 「섹스」를 구성하고 있다. 컴퓨터속에서 만들어지는 가상현실을 현실공간으로 끌어내 입체화하기 위해 「달」은 전시장 중앙에 높이 2m의 대형 스크린을 세우고 주위를 거울로 둘러쌌다. 관람객이 중앙에 놓인 컴퓨터속의 화면을 움직이면 이 화면이 영사되어 주변 거울위에 비친다. 이곳에서는 쉽게 둘러볼 생각을 말아야 한다. 자신이 선택하는 주체적 감상이 필수다. 맨 처음 주어지는 공간은 허름한 집들이 늘어선 주택가 골목. 화면속을 움직이다 커서를 화장실에 놓으면 포르노낙서가 펼쳐지고 창문을 들여다보면 침실장면속에 젊은 연인의 섹스가 펼쳐지는 식이다. 다른 장면으로 가도록 이끌어주는 힌트는 없다. 우연한 발견을 통한 상상의 자극을 위해서다. 초기에는 주최측이 컴퓨터조작을 대신해주기로 했다. 관람은 무료. 그러나 컴퓨터에서 현실로 이끌어내진 가상 공간은 컴퓨터화면과 함께 사라지는 또하나의 가상현실일뿐. 따라서 이들의 예술작업은 결국 「가상예술」, 즉 「사이버 아트」다. 〈이원홍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