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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에세이/21세기 앞에서]退溪學의 재조명

입력 | 1997-04-10 19:55:00


조선 중기의 학자 퇴계 李滉(이황)선생은 국력을 키우기 위해 오늘날 고속도로의 개념인 신작로(新作路)를 전국에 걸쳐 동서로 다섯개, 남북으로 세개 만들 것과 집집마다 소를 두 마리씩 기를 것을 조정에 건의했다. 그런데 당시 조정의 모든 대신들은 한결같이 이를 반대했다고 한다. 큰 길을 내면 오랑캐가 쳐들어오기 쉽다고 하는 소극적이고 패배주의적인 이유에서였다. 만일 그때 조정이 퇴계선생의 제안을 받아들였더라면 우리 역사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고유의 실용학문▼ 큰 길을 내려면 대형건설 토목 장비가 필요하고 그런 장비를 만들기 위해서는 강한 쇠를 많이 쓰게 되니까 철강업이 발달했을 것이고, 그 결과 병기를 만들 능력이 생겨나 임진년(壬辰年)의 전쟁에서 일본에 그토록 무참히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철기가 발달하면 국토개발과 영농기술도 발전하게 되니 농업 생산량이 증대했을 것이고, 수송수단이 발달하고 큰 길을 따라 물자수송이 원활해져 경제가 크게 발달했을 것이다. 또 소를 기르게 되면 사료 생산과 저장법이 발달할 뿐 아니라 우생학 수의학 등이 발전하면서 인간과 동물의 공생(共生)이라는 공동체 원리가 사회 전반에 자리잡았을 것이다. 더구나 소를 많이 기르려면 사람들이 말을 타게 되고 쉴 곳을 위해 그늘이 필요하니 식목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 말과 소가 소득을 가져와 목축업이 부흥할 뿐만 아니라 전시에는 기마병을 만들어서 전투력이 높아졌을 것이다. 퇴계학은 이처럼 나라를 튼튼히 하고 국민 경제를 살찌우는 실용적인 학문으로 현실을 밝혀주는 우리 고유의 자본주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조상의 지혜가 있는데도 우리는 모든 것을 자꾸만 밖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한 국가가 일류가 되기 위해서는 부(富)와 강(强)만 갖고는 안되며 그 사회를 지탱하는 지도적 원리가 있어야 한다. 특히 새로운 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는 지각변동에 비유될 정도의 변화가 닥치는 만큼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퇴계학을 새롭게 조명하고 사회 전반에 적용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기술개발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고 경제발전이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은연중에 기술자를 「장이」로, 상인을 「장사꾼」으로 가벼이 여기고 있다. 아직도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서열의식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기술과 경제가 주도하는 국제사회에서 더 이상 발돋움하기 어려워진다. ▼「士農工商」의식 벗어야▼ 국제사회에서는 기술이 뛰어난 나라가 큰 소리치며 떵떵거리고 있고 장사 잘해서 돈 많이 번 나라는 경제는 물론 정치까지 주도한다. 퇴계선생 역시 이 시대에 살아 있다면 「신(新)사농공상」을 얘기했을 것이다. 사(士)는 수준높은 이론으로 든든한 받침이 되어 주고, 농(農)은 풍성한 수확으로 국민의 힘이 되어 주며, 공(工)은 좋은 기술로 사람이 잘 살아가는 물질적 환경을 만들어 주고, 상(商)은 깔끔한 매너로 국제사회를 리드해 나가는 것으로 말이다. 이건희(삼성그룹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