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찌에게도 꿈은 있다」. 「주유소 총잡이」 「삐끼」 「밤의 꽃」 「철가방」. 일등의 꿈만큼이나 꼴찌의 꿈도 소중하다. 일등이 하나이듯 꼴찌도 하나이기 때문이다. 꼴찌의 것은 기억되지 않기에 더욱 애절하다. 서울 종로구 신설동 K주유소. 지난 1년동안 단 한번도 꼴찌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김정은양(가명·16·인천M고 2년). 그런 정은이가 이번에는 꼴찌은퇴를 선언하고 새로운 꿈을 가꾸기 위해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이곳에서 하루에 8시간씩 「총」을 쏘면 한달에 30만∼40만원은 번다. 『윤락가나 술집에 나가면 여기보다는 훨씬 많이 벌지만 일단은 자리부터 잡는 게 우선이죠』 정은이는 이곳에서만은 꼴찌가 되지 않겠다는 각오로 차가 들어오면 제일 먼저 달려간다. 『어서오세요』 『얼마나 넣을까요』 『안녕히 가세요』 정은이가 손님들과 나누는 대화의 전부다. 스피커에서도 정은이가 좋아하는 댄스곡이 계속 흘러나와 흥을 돋운다. 정은이가 이곳에서 일한 것도 벌써 3달여. 지난 1월 새아버지가 싫어 같은 학교 남자친구 상욱(가명)이와 함께 집을 나왔다. 『내마음대로 살아보고 싶었어요. 좋아하는 남자친구와 함께 있고 싶기도 했구요』 하지만 휘발유 냄새에 지쳐 힘들 때는 돌아가신 아빠가 그리워진다. 『아빠 나는 커서 선생님이 될래』 그러나 학교를 떠난 정은이에게 이제 그 꿈은 신기루 같은 것이 돼버렸다. 대신 요즘에는 새로운 꿈을 갖게 됐다. 「영화배우」. 친구들은 우피(우피 골드버그)라고 부르지만 정은이는 자신을 맥라이언으로 불러달라며 웃음을 참지 못한다. 정은이는 이곳에서 돈을 모아 연기학원에 다닐 계획이다. 『정은이 누나 사인좀 해주세요』 열광하는 팬들을 떠올리면 힘이 솟는다고 말한다. 단란주점에서 「삐끼」로 일하고 있는 정은이의 남자친구 상욱이도 요즘엔 힘이 펄펄 난다. 상욱이도 학교에서는 알아주는 꼴찌로 통했다. 엄마가 없는 상욱이는 꼴찌가 지겨워 거리로 뛰쳐 나왔다. 그러나 이곳 유흥가에서는 더이상 꼴찌가 아니다. 상욱이는 이곳에서 베테랑 「삐끼」로 통한다. 손님들이 내는 술값의 10%는 상욱이 몫이다. 형들에게 얻어맞고 돈도 뺏기지만 열심히 뛰면 한달에 2백만원은 거뜬히 번다. 상욱이의 꿈은 전 세계에 패스트푸드 체인망을 갖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음식을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체인점을 만들어 세계적인 회사로 키워 나간다는 생각이다. 〈박정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