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싸우느라 미래를 못보고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한보사건으로 시작된 현 정국을 말하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은 과거와 미래가 충돌하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를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활용하지 못하고 「자학적인 집단사고의 오류」에 빠져 들어 미래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제2의 도약이냐, 시궁창에 처박히느냐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과거를 덮어두자는 오해를 낳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 과거때문에 미래망쳐서야 『그런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과거를 보는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를 「썩음」과 「삭힘」의 차이로 설명하고 싶습니다.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허우적댈 때는 썩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능동적으로 과거를 활용해 진흙탕속에서 연꽃을 피워내면 그건 바로 삭힘이 됩니다. 조개가 고통속에서 돌을 삭혀 진주를 만들어 내는 과정과 같습니다』 박명예총장은 『요즘 우리 사회에는 환멸감과 냉소적인 태도만 확산돼 가고 있다』면서 『부정적인 태도가 국민들 마음속에 내면화될때 반(反)생명적인 기운이 퍼져가게 되고 결국 미래지향적인 대안이 나올 수 없다』고 걱정했다. ―말씀이 가슴에 와닿기는 하지만 다소 추상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보다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한다면…. 『우선 정치인들의 도덕 불감증과 당리당략에 얽매여 있는 체질과 관행을 고쳐야 합니다. 언론에도 불만이 많습니다. 언론은 「사회의 거울」역할을 해야하지만 「풍향계」역할도 중요한데 요즘은 거울역할에만 넋이 팔려 풍향계의 소명을 등한시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우리 모두가 지금 왜 한보청문회를 하고 있나, 즉 목적을 깜빡한 채 혹시 「한풀이식 청문회」를 하고 있지 않느냐고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목적을 가지고 행동을 해야지요』 ―청문회에서 증인들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모른다』로 일관해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는데요.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볼 때는 그렇지요. 우리 솔직하게 말해 봅시다. 과거 대통령선거에 나왔던 후보들중 기업돈 안받은 사람 누가 있습니까. 국회의원도 그렇습니다. 설령 한보 돈을 안받았다고 해도 떳떳한 국회의원이 과연 몇명이나 됩니까. 며칠전 국회의원들을 만나서 「감옥에 간 사람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들이 당신들 중 몇명이나 됩니까」고 물어봤더니 아무도 말을 못하더군요』 박명예총장은 이 대목에서 『이런 사실은 국민 대다수가 알고 있는 일 아니냐』면서 한보청문회는 정경유착을 끊는 계기를 마련하는 청문회가 돼야 하며 「갈때까지 가보자」는 방식으로 전개돼서는 안된다는 논리를 폈다. 그는 이어 『이번 청문회가 정치권의 고해성사의 장이 돼야 하고 金賢哲(김현철)씨도 자신의 잘못을 청문회에서 솔직히 고백해야 한다』면서 청문회가 끝난 후의 대통령의 역할을 강조했다. 『金泳三(김영삼)대통령이 다시는 이같은 청문회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확실하게 다짐하고 남은 임기동안 마음을 비우고 제도적 개혁과 함께 국민통합의 의식혁명에 나서겠다는 결의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치권은 당리당략의 유혹에 빠져 청문회를 진행할 경우 우리나라는 걷잡을 수 없는 수렁에 빠져들게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시기를 놓치면 오늘의 정치인들은 역사의 죄인이 됩니다』 ▼ 범국민 부패추방운동 펴자 박명예총장은 서강대 총장 재직시절 앞뒤를 재지 않는 직선적인 발언때문에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기도 했다. 한편에서 성직자이기때문에 두려움없이 소신을 밝히는 것이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한쪽에 너무 치우친 시각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엇갈린 평가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서 『주위에서 어떻게 평가하든 현 시국이 매우 걱정스러운 상황이고 따라서 나라를 생각하는 충정에서 나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일뿐』이라고 설명한다. ―대선자금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국민들이 납득할만한 수준의 사과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수준 그 자체는 대통령이 판단해야겠지요. 우리 국민들은 결코 독하지 못합니다. 대통령과 김현철씨가 정말 욕심을 모두 버리고 가슴으로 사과한다면 대다수 국민들은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국민이 납득할만한 수준은 어느 정도가 될 수 있을까요. 『대통령이 얼마나 진심을 바탕에 깔고서 얼마만큼 미래지향적이고 실현가능한 수습대책을 내놓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정경유착은 넓게 말해 부정부패인데 이번 기회에 정치권만 쳐다볼 게 아니라 범국민적인 부정부패추방운동도 함께해야 합니다. 국민의 의식이 개혁돼야만 정치권도 맑아질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부조금 안받기운동같은 것을 당장 시작해야 합니다』 박명예총장은 국민 분노가 그렇게 쉽게 가라앉을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모두가 네탓을 말할 것이 아니라 내탓이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는 문제를 바라보는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국민이 현 상황을 「네탓에 나라가 이꼴이 됐다」 「갈 때까지 가보자」는 부정적인 태도로만 바라보면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겠지요. 위기를 도약의 계기로 삼는 지혜가 절실합니다』 ▼ 검찰 한보수사 엄정히 ―청문회가 진행되는 한편으로 한보사건에 대한 검찰의 강도높은 수사가 이루어지고 있는데요. 『정치가 법 위에 있을 수는 없지요. 수사는 수사대로 엄정하게 이루어져야 하고 법적 조치와 별도로 사회의 모든 역량이 투입돼 해법을 도출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의혹을 밝힌다는 것과 될 대로 돼라는 냉소적 태도는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현 상황을 「총체적인 난국」으로 인식하는 것은 너무 비관적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위기를 강조함으로써 정부편을 든다는 오해도 불러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바로 그같은 인식때문에 사회 원로들이 오해를 받을까봐 입을 다물고 있고 그래서 성질급한 제가 나섰습니다. 저는 정권을 생각하며 말하는 게 아니고 나라를 생각하며 말하는 겁니다. 이 나라가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한순간 삐끗해서 나락으로 떨어지면 되겠습니까』 박명예총장은 현상황을 「총체적 난국」으로 인식하는 자신의 논리를 거침없이 전개했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화두는 「민주화」 「세계화」 「통일」 등 세가지 입니다. 그러나 민주화는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로, 세계화는 불황과 경제정책의 실패로 발목이 잡혀 있고 통일은 준비자체가 돼 있지 않습니다. 이 세가지는 모두 맞물려 있는 고리들입니다. 현 상황은 어느것 하나 풀려 나가질 않고 서로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어요. 우선 정치쪽에서 매듭을 풀면서 경제문제와 통일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다음달까지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 우리는 심각한 상황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올 봄 대학생들의 움직임을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현재 한총련으로 대표되는 운동권 학생들은 금년을 학생운동의 최적기로 보고 본격적으로 「김영삼대통령 하야투쟁」을 펼칠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정치권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기 직전인 이 시기에 학생들의 주장은 쉽게 먹혀들 가능성이 있고 학생 재야 노동계가 연합할 경우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 국민 집단우울증 심각 ―한총련이 지난 3월말 계획한 동맹휴업 등록금 투쟁 등이 일반학생들의 호응을 받지 못해 무산됐습니다. 우리 사회의 의식수준이 이제는 그 정도 수준은 넘어섰다고 보시지는 않는지요. 『평소에는 우리 사회가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의 저질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뿌리째 드러나고 있는 시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보청문회가 계속해서 국민에게 좌절감을 심어줄 때 5월은 자칫 위기의 5월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박명예총장은 『정치인들은 당리당략에 빠져 있고 기업인들은 경제위기의 원인을 근로자에게, 근로자는 기업인에게 떠넘기고 있다』면서 『한보사건을 계기로 국민이 집단 우울증에 빠져 「자생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덩치가 큰 사람도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병균이 침입하면 건강을 잃고 목숨을 잃을 수 있다』며 『우리에게는 북한변수가 있다는 현실도 생각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북한의 위협은 어느 정도라고 보십니까. 『식량난으로 체제붕괴론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군부가 득세하는 북한이 막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북한의 급격한 붕괴는 현실적으로 한국에 엄청난 부담을 야기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통일문제와 관련해 국민이 합의한 공감대가 없어 문제입니다』 ―경제문제는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요. 『저는 경제전문가가 아니어서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기업인과 근로자들이 이번 기회에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할 「공동선」에 대해 합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쪽이 자기 이익만을 추구했을 때 둘다 손해를 본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정부가 빈부격차라든지 과도한 생활비, 부정부패문제를 해소하면서 이를 뒷받침해줘야겠지요』 〈정리〓이병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