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한국의 인문교육이 정상적이었다면 이 책은 태어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대학에 들어가면 깡그리 잊어버릴 과도한 정보로 청소년들의 두뇌를 터지게 하는 중등 교육과정이나 논술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사유의 획일성을 아예 제도화한 입시 정책을 정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도대체 논술이 별도 과목으로 독립해야 할 까닭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논술의 목적이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사유와 논리적인 언어능력을 계발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꾀를 써도 윤리 문제의 틀을 벗어날 수 없고 학생들은 미리 짠 각본을 들고와 단어들만 요리조리 바꿔가며 답을 조립해내는 지금의 논술은 오히려 본래의 취지를 컴컴한 독방에 유폐시키는 억압 기제에 다름 아니다. 인문 교육에 중요한 것은 상투적인 중용의 논리도 논술의 기술도 아니다. 사유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생활인 것이지 학습과목이 아니며, 논리는 생활의 율동인 것이지 별난 기술이 아니다. 그런 뜻에서 「소설 속의 철학」은 삶과 사유를 자유롭게 교응시키는 글읽기와 글쓰기의 모범적인 대안으로 제시됐다고 하겠다. 저자들이 책의 푯대로 내세운 「작품으로 하는 글쓰기」는 선험적인 윤리 기준이나 고정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작품을 읽어내고 그로부터 삶에 대한 성찰과 전망을 새로운 글로 재구성해내고자 하는 의지의 압축된 표명이다. 자유로운 글읽기와 글쓰기를 추구하기 때문에 저자들의 글 또한 획일적이지 않고 다양하게 열려 있다. 굳이 가른다면 이왕주는 서술적이고 분석을 지향하며 김영민은 고백적이고 이해를 지향한다. 말하자면 이왕주는 이런저런 얘기들을 다감하게 들려주면서 그 일화들 사이의 비교를 통해 삶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이끌어내고 있으며 김영민은 그가 읽은 이야기를 가슴 깊숙이 들이마신 후 거기에 제숨결을 섞어 삶의 뜻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고 고양시킨다. 이왕주의 글에는 의미를 묻는 물음표가 곳곳에 박혀서 물음표와 마침표들의 리드미컬한 조화가 글에 촉촉한 생기를 불어넣고 있으며 김영민의 글은 사유자의 인식의 깊이가 경험인의 생생한 추억과 어울려 아주 감각적인 생의 떨림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이 생기와 떨림은 그들의 글 읽기를 또하나의 글쓰기로 부활시킨다. 이는 독자들을 글읽기와 글쓰기의 나선형적 순환놀이에 참여하도록 자극하는 상쾌한 촉매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진리의 소금을 가두고 있는 항아리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글 생각과 세상 생각을 쉼없이 드나들게 해주는 둥근 사유의 반지라고 할 수 있다. 정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