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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박완서/왼 손이 모르게

입력 | 1997-04-22 20:08:00


북한의 굶주린 어린이들이나 헐벗은 산하를 사진으로 보거나 믿을만한 소식통을 통해 전해듣는 일은 괴로운 일이다. 몇해전까지만 해도 설마 그 정도까지야 하고 어느 정도 과장되었을 가능성을 감안해가며 들어넘길 수도 있었지만 그들의 식량난이 도처에서 굶어죽는 어린이가 생길 정도로 심각하다는 게 확실시되면서 북한문제는 마치 부드러운 음식에 숨은 가시처럼 우리의 일상생활을 편치 못하게 하고 있다. 피골이 상접한 소말리아나 에티오피아 어린이들의 참상도 가슴의 통증 없이는 보아넘길 수 없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하물며 지척에 사는 우리 민족의 그같은 참상에 있어서랴. ▼ 굶어 죽는 북녘 동포 ▼ 하나 북한과 우리와의 관계는 이렇게 지극히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모성애에 가까운 동포애조차 종종 난관에 부닥치게 할만큼 어려운 사이라는 것은 이미 지치도록 겪어온대로다. 이번에는 김일성 우상화작업과 생일잔치에 막대한 돈을 들인다는 보도가 확산되는 동포애를 위축시키고 있다. 심지어는 우리가 도와준 걸 가지고 그들이 군량미나 고위층의 사치를 위해 쓸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소리도 있다. 그러나 수많은 어린이가 굶어죽어가고 있다는 게 사실인 이상 그런 영악한 계산보다는 우선 어린이의 굶주림이나 배고파 우는 자식에게 끼니를 끓여줄 수 없는 어미의 고통은 누가 뭐래도 외면할 수 없는 인간의 도리에 무조건 따라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먹고 남게 흥청거리기 때문만은 아니다. 만일 우리가 먹고 남게 잘 사니까 도와주자면 계산에 능한 이들은 우리나라 국민 각자가 걸머지고 있는 외채의 액수를 따져가며 빈곤감을 부추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즈음 같은 때일수록 우리네 대다수 국민들은 물질적으로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어떻게든지 넉넉해져야 한다. 요즈음이 어떤 때인가. 온통 돈 때문에 전국이 술렁이고 있다. 돈도 저쯤 되면 돈이 아니라 고약한 오물과 다를바 없다 싶다. 그들의 돈놀음을 보고 있으면 우리네 보통 사람도 불과 몇천만원은 돈도 아니다 싶게 간덩이가 부어오르는 느낌도 고약하거니와, 그나마 안먹었다고 잡아떼려고 갖은 꾀를 다 부리는 점잖은 체면들이 흡사 고급 양복에 똥물이 튈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과도 같으니 말이다. 똥물이 대다수 선량한 국민에게까지 튈 리는 없지만 냄새야 어디가랴. 우리도 스스로 자정(自淨)노력을 하지 않으면 도무지 께적지근해서 못살 것 같다. ▼ 도울땐 생색내지 말아야 ▼ 돈이란 좋은 것이다. 돈이 있어야 자식들 공부도 시키고 일용할 양식도 살 수 있다. 오죽하면 돈버는 직업을 밥줄이라고 했겠는가. 그런 돈을 그들의 뇌물액수와 비교해서 몇백년치니 몇천년치니 하는 따위의 계산은 하지 말자. 그건 우리가 번 돈을 비하하는 일이다. 생명과 오물을 비교해선 안된다. 권력과 재벌이 말아먹은 돈을 액수로 따지자면 나라가 휘청할 것 같지만 천만에, 우리가 결코 망하지 않는 것은 각자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여 정직하게 번 돈으로 새끼들 먹여살리고 남의 새끼가 굶는다면 얼른 쌀 됫박이라도 퍼낼 여유가 있는 대다수의 근면하고 인정이 넉넉한 국민들이 이 나라를 굳건하게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가 상대니만큼 북한 돕기에 있어서는, 남을 도울 때는 결코 떠벌리거나 생색을 내려들지 말아야 한다는 아름다운 원칙은 더욱 철저히 지켜져야 할 것이다. 박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