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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며 생각하며]허신행/아름다운 소비

입력 | 1997-04-24 20:27:00


얼마 전 미국에서 「얼굴 없는 천사」가 우연히 실체를 드러내 미국인들은 물론 우리에게도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15년간 6억달러(약 5천1백억원)이상을 익명(匿名)으로 자선단체 등에 기부, 미국 언론의 끈질긴 추적을 받아 온 주인공은 뉴저지주에서 공항 면세점 그룹을 운영해 온 찰스 피니(65). 그는 15달러짜리 싸구려 시계를 15년째 차고 집과 자동차도 없이 검소한 생활을 해 온 「자수성가」의 전형이었다. ▼ 한 美노인의 「자선인생」 ▼ 피니의 선행이 세상에 알려진 것도 그의 뜻과는 상관 없었다. 그가 운영해 온 회사를 매각함에 따라 이를 인수한 새 주인이 회계장부에서 기부 행위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는 회사 매각으로 받은 35억달러(약 2조9천억원)도 자선 단체에 기부했다고 한다. 그러고도 끝내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피니는 뉴욕 타임스지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부한 것은 내가 필요한 것보다 많은 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돈은 매력적일 수 있지만 누구도 한번에 두 켤레의 구두를 신을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의 검소한 생활과 거액의 기부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 훌륭한 것은 아무런 대가나 명예도 바라지 않고 남의 마음을 산다는 생각마저 없이 마치 허공을 산 것이나 다를 바 없는 무상보시(無償布施)였다. 이 같은 무소유의 빈 마음이 사람들에게 뭉클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소비를 한 것이다. 그는 어떤 물질의 소비에도 비유할 수 없을 만큼 값진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마음의 소비 그 자체다. 물론 이런 자선가는 한두 사람이 아니다. 최근 미국신문 USA투데이가 소개한 구두쇠 거부(巨富)의 자선행위도 감동적이다. 평생 모은 수백만달러의 재산을 모두 사회에 헌납했다. 중요한 것은 물질 만능의 자본주의 종주국이랄 수 있는 미국 사회에서 이런 마음의 소비가 늘고 있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우리 나라에도 이런 감동적인 자선 행위는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30여년간 홀몸으로 여관을 운영해 번 돈 1억원을 소년 가장들에게 기증한 「영등포 또순이」 인태순할머니(71), 40년간 홀몸으로 행상과 삯바느질을 해서 모은 1억원을 전북대에 장학금으로 기부한 최은순할머니(80), 40여년간 김밥을 팔아 모은 50억원 상당의 재산을 충남대에 기증한 고 이복순 할머니(당시 78세) 등 선행으로 마음의 소비를 보여준 사람들은 많다. ▼ 사치에 멍든 한국경제 ▼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내 몸 하나를 치장하기 위해 서민 아파트 값에 해당하는 수천만원짜리 외제 모피코트를 구입하는가 하면 2백만원짜리 양주를 폭탄주로 마시고 고급 외제 승용차 가구 냉장고 골프채 카펫 보석 등을 마구 사들인다. 물질적 자기 만족을 위해 들여온 사치품의 수입액이 상상을 초월한다. 지난해 금 은 다이아몬드 진주 등 귀금속 및 보석류 수입액이 60억달러, 의류 14억달러, 자동차 8억6천만달러, 가구 2억9천만달러, 양주 2억달러, 보신 관광에 쏟은 외화도 1억달러를 넘는다. 이런 사치성 소비는 마음의 소비가 아니다. 정신을 타락케 하고 나라 경제를 무너뜨리는 독버섯같은 소비다. 국가 경제가 어려운 이 때, 아름다운 마음의 소비까지는 흉내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치성 과시 소비는 억제하고 건전하게 소비하거나 은행에 저축하는 자세가 아쉬워진다. 허신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