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잉글랜드의 봄은 그렇게 더디게 오는가 보다. 20년 만에 불어닥친 폭풍설(暴風雪·블리자드) 탓으로 4월1일 레이니 전 주한대사와 동행한 우리 캐러밴 일행은 뉴욕에서 열차편으로 5시간 넘게 걸려 보스턴에 닿았다. 눈이 50㎝를 넘게 내려 온 도시가 정전 소동을 겪는 등 난리였다. 호텔로 가는 길이 온통 눈으로 덮여 마치 스키장의 모굴을 넘는 것처럼 덜컹거리는 차안에서도 다음날 저녁 하버드대 만찬 간담회 모임이 은근히 걱정됐다. ▼ 한국 홍보 「캐러밴 행사」 ▼ 韓美(한미) 양국의 민관 인사들은 지난 7년간 해마다 마치 오아시스를 찾아다니며 장사하는 대상(隊商)들 처럼 미국의 주요 도시를 함께 순회하며 한국경제 환경을 설명하고 투자와 무역을 촉진하는 캐러밴 행사를 해왔다. 올해는 우선 외신을 타고 퍼지는 한국경제의 어려움을 올바로 이해시키는 문제, 북한 문제로 인한 안보 환경 설명 등 그 어느 해보다도 가는 곳마다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특히 대학에서 연구하는 학자와 학생들의 열기가 대단했다. 4월2일 저녁 아르코 포럼. 하버드대 케네디 정치대학 정치학연구소가 운영하는 공공행사장 아르코 포럼은 세계의 유수한 정치인들을 초청해 강연을 듣고 교수와 학생들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권위있는 토론의 광장이다. 이날 만찬 간담회에는 1백명이 넘는 청중이 모였다. 백악관 경제보좌관을 역임한 바 있는 로저 포터교수가 사회를 맡고, 안보문제를 강의하는 테리 스코트장군, 폴라 재콥슨 행정대학원 교수 등 하버드대 교수들, 마이클 샌들러사장 등 경제인들과 케네디 정치대학 동창회 회원들까지 이 지역 주요 인사들이 많았다. 과연 보스턴은 「태양계의 중심」이라던가. 마침 카자흐 정부의 제1부총리 외무차관 국방차관 대통령 안보보좌관으로 구성된 고위급 연수단도 자리를 같이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4자회담의 중요성, 한미간의 통상 문제, 대만의 핵폐기물 북한 반출 문제 등 우리 정부의 외교 현안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나갔다. 이어 레이니 전대사가 나섰다. 『한국은 경제발전과 민주화로 미국의 안보 동맹국이면서 중국 시장을 능가하는 경제 동반자가 된 반면 북한은 공산정치의 실패로 기아와 경제 파탄에 빠졌다. 남북한간의 냉전은 두말할 것 없이 한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승리가 한반도의 안보 위기를 증대시키고 있다. 절망적인 북한이 군사적 모험주의로 나가 전쟁을 도발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김영삼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이 북한을 대화로 국제사회에 끌어내려고 4자회담을 제의했지만 북한의 호응이 느려 자못 우려된다』 ▼ 우방다운 비상한 관심 ▼ 불현듯 작년 봄 제주도에서 양국 대통령을 모시고 4자회담 공동제안을 위해 함께 노심초사했던 레이니 전대사와의 인연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지난 3년 반 동안 주한 대사직을 훌륭히 마치고 애틀랜타 에모리대에 다시 돌아와서도 한국을 사랑하는 우정에서 캐러밴 행렬에 합류한 노학자의 배려가 고맙기 그지없었다. 날카로운 질문들이 쏟아졌다. 스티븐스 상원의원 일행이 방북했을때 미국이 식량원조를 안해주면 북한 군부의 강경론을 막을 수 없다던 외교부 관리들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또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한국이 정전협정의 당사국이 되는 방안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도 있었다. 옌징 연구소의 에드워드 베이커박사였다. 아르코 포럼의 연설은 언제나 VTR로 녹화돼 미국의 공영방송 PBS채널을 타고 전국에 방영된다. 그래서 나와 레이니 전대사는 사전에 방송해도 좋다는 문서에 서명을 해야만 했다. 뉴욕∼보스턴∼애틀랜타∼랄리∼프린스턴∼피츠버그∼필라델피아로 이어지는 캐러밴 일정은 고단한 행렬이었다. 그러나 가는데마다 비상한 관심과 성원때문에 미국이라는 우방에서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았다. 박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