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기분좋은 어린이날 아침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생각나는 아낙네가 있다. 옛날 내가 살던 동네의 아낙이 구멍가게에 반찬거리를 사러 나왔을 때의 일이다. 엄마를 따라나온 어린 아이가 이것저것 사 달라고 떼를 썼다. 참다못한 엄마는 아이를 한대 때리려고 손을 번쩍 올렸다. 그러나 순간, 「오늘은 5월5일 어린이날」이라는 생각에 아낙은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아빠 안계신다 해라』▼ 「어린이날에 손찌검을 해서는 안되지…」. 아낙은 올렸던 손을 뒤로 감추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늘만 지나봐라』 그 아이는 「어린이날」 덕분에 매맞을 일을 하루 물린 셈이니 다행이었겠지만 분명 그날 밤 꿈자리는 무척 무서웠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는 이런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다. 『거짓말하면 못써. 정직한 사람이 돼야지』 『네』하며 어린 아들이 고개를 숙인다. 대문 밖에서 누군가 주인을 찾는다. 빚쟁이의 목소리였던지 아비는 『지금 안 계신다 해라』고 일렀다. 어린 아들은 시키는 대로 했다. 『지금 안 계십니다』 그랬더니 어디 갔느냐고 되묻지 않는가. 어린 아들은 주저주저하다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빠! 어디 갔다고 그럴까』 이쯤되면 정직을 가르치려던 아비가 자식에게 거짓말을 연습시키는 꼴이 된 것이다. 어린이날, 나는 어른들을 생각한다. 얼마전까지 계속됐던 청문회의 모습은 무슨 꼴인가. 거짓말과반말,오만불손하고 교양없는태도, 그리고 어른들의 어처구니없는 눈물…. 부모와 함께 그 광경을 지켜봤던 어린이들이 묻는다. 『저 사람들 왜 저래?』 많은 사람들이 잊었지만 지금으로부터 40년전, 1957년5월5일 우리나라에도 「어린이 헌장」이라는 것을 뜻있는 어른들이 꾸며서 처음 세상에 펴 낸 적이 있다. 「어린이는 인간으로서 존중하여야 하며…」로 시작되는 이 헌장은 우리 어린이들을 이렇게 가르치고 이렇게 키워야 한다는 것으로 어른들에게 하는 간절한 부탁의 말이었다. 「어린이들을 위한 어른들의 헌장」이었던 셈이다. 이 헌장을 선생님들이 가득 모인 대강당에서 어린 학생이 앞에 나와 소리소리 높여 큰 소리로 읽었으니 「아비가 할 일을 자식이 외친 꼴」이었다. 나는 1972년 어린이들이 스스로 지켜 나가야 할 「어린이 다짐」을 나름대로 만들어 본 적이 있다. 1.아침 일찍 일어나서 우리 둘레를 깨끗이 치는, 부지런한 어린이가 되겠습니다. 2.우리에게 알맞은 놀이와 노래와 이야기로 꿈을 키워 나가는 어린이다운 어린이가 되겠습니다. 3.옳은 일과 돕는 일과 힘든 일에 앞장서는 씩씩한 어린이가 되겠습니다.▼「어린이 헌장」새겨보자▼ 4.거짓말과 나쁜 말을 입에 담지 않으며 한번 정한 일은 그대로 밀고 나가는 꿋꿋한 어린이가 되겠습니다. 5.꽃과 나무를 사랑하고 사람을 따르는 짐승들을 위해 주는 인정바른 어린이가 되겠습니다. 6.부모와 스승과 이웃을 기쁘게 해드리고 웃어른을 섬기는 예절바른 어린이가 되겠습니다. 7.이 땅에 태어난 것을 자랑으로 삼으면서 세계 어린이와 손을 잡고 나가는 슬기로운 어린이가 되겠습니다. 어린이날, 나는 이 「어린이 다짐」을 「어른들의 다짐」으로 바꾸어 부르고 싶다. 내 나이 올해 86세다. 어른들도 나에게는 어린애같아 하는 말이다. 어른들이 허튼소리 하지 않는 나라가 선진국이다. 어린이날, 어른들이 잘 하자. 윤석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