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골 농민이 토지문제로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을 담당한 관리가 술만 마시며 차일피일 판결을 미뤘다. 참다못한 농민이 『임금이 착하지 못해 이런 사람을 수령에 임명했다』고 비난하다 구속됐다. 소식을 들은 임금이 말했다. 『무지한 백성이 어린애가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처럼 순진한 짓을 한 것인데 어찌 죄를 주겠느냐』 그 임금이 오는 15일로 탄생 6백주년이 되는 성군(聖君) 世宗大王(세종대왕)이었다. ▼ 세종대왕의 愛民정신 ▼ 세종의 성군다움은 그 철저한 애민(愛民)정신에 있었다. 가뭄이 심해져도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면서, 신료(臣僚)들은 임금의 잘못과 정령(政令)의 흠과 민생의 고통을 숨김없이 다 말하여 임금이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근심하는 지극한 심정에 도움이 되게 하라고 부탁했다. 그는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생각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군왕이 백성에게 믿음(信)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글 창제도 백성들이 법전을 읽을 줄 몰라 소송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애민정신에서 출발했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소리」라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은 다름아니라 백성이 자기 뜻을 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당대 최선진 농업기술서적과 의약서적들을 펴낸 것도 민중의 생활수준과 복지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과묵하면서도 강한 결단력의 소유자였던 세종이 개혁을 추진하는데 살얼음을 걷는듯한 신중함을 보인 것도 개혁에 따른 백성들의 고통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가 세제(稅制) 개혁을 위해 14년이라는 세월을 소비하고 관료에서 시골 백성에 이르는 17만명의 여론을 조사한 것은 역사에 없는 일이었다. 쉽게 생각하는 사람은 일을 이루지 못하고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일을 이룬다는 것이 그의 개혁철학이었다. 세종의 또 다른 성군다움은 밤을 새워 글을 읽고 손에서 책을 놓는 일이 없던 호학(好學)의 정신에 있었다. 유학의 고전을 넓고 깊게 섭렵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성리학 역사학 경제학 법학 군사학 언어학 천문학 수학에 이르기까지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음악에 관해서도 경(磬)돌에 먹줄이 남아 음이 높아진 것을 귀로 듣고 분간하는 탁월한 감각을 지녔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아악(雅樂)을 정리했다. 세종이 문화가 만발한 성세(盛世)를 열 수 있었던 것은 이 호학의 결과였다. 그가 만든 세상의 힘은 문화에 있었다. 그는 당대 세계 최고수준의 학문으로 무장한 투철한 역사의식으로 시대가 요구하는 국가적 과제를 파악하고 이를 강한 주체성으로 추진함으로써 독창적 민족문화를 창조했다. 이슬람 천문학을 적극 수용한 자주적 역법(曆法)체계와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 최첨단 과학기계의 발명은 그 독창적 민족문화의 위대한 보기였다. 집현전(集賢殿)을 통한 인재 육성과 활자개량을 통한 서적의 보급은 그가 문화창달을 위해 선택한 수단이었다. ▼ 부끄러운 요즘 정치인들 ▼ 세종이 국가의 영토를 두만강 압록강으로 확장하고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한 것도 뜻깊다. 그는 민족의 문화역량을 국제수준으로 높이면서 단군신화를 새롭게 기록하고 신라 고구려 백제의 시조를 제사지낸 민족자주정신의 소유자였다. 중국 음운학의 당대 권위자인 그가 우리 글자인 한글을 창제하고 반포한 바로 그것이 그의 「세계화」 방식이었던 셈이다. 「동방(東方)의 堯舜(요순)」 세종대왕은 도덕적으로 엄격한 실용주의적 철인(哲人)군주였다. 그는 국가의 미래에 빛을 던졌다. 그 6백년 전의 세종대왕이 너도 나도 지도자를 자처하고 지도자 되기를 꿈꾸는, 공부와는 담쌓고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기만 한 오늘의 정객들에게 주는 가르침은 무섭다. 그들 모두 세종대왕의 못난 후예로 이 땅에 사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야 한다. 김종심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