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향한 필사의 뱃길이었다.
지난 9일 신의주를 출발, 12일 남한 해군함정에 발견되기까지의 나흘간은 뱃사람이 아니고는 꿈꿀 수 없는 대담한 탈출드라마였다.
선장 안선국(49)씨와 기관장 김원형(57)씨는 평소 한 배에 몸을 싣고 파도를 헤쳐온 형제같은 사이. 바다에서 함께 고기잡이를 하면서 라디오를 통해 전해들은 남한은 별세계였다.
지난해말 김경호씨 일가족의 귀순 등 잇따른 탈북자들의 소식도 들려왔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북한을 떠나자는데 마음이 모아졌다.
그러나 방법이 문제였다. 탈북자들이 잇따르면서 국경경비가 강화됐다. 대부분의 탈북자들이 이용해온 중국이나 러시아로 탈출하는 것은 무리였다. 더구나 가족과 함께였다. 갖고 있는 배를 이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치밀한 탈출계획이 필요했다. 단 한번의 실패는 끝장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식량을 준비하고 배는 「요동어(遼東魚) 3043」이라는 중국어선으로 위장하기로 했다.
그러나 두 가족이 한꺼번에 배를 타고 신의주를 탈출한다는 것은 모험이라는 판단이 섰다. 신의주에서 남하하다 북한 해군 경비정의 검문을 받을 경우 변명할 길이 없었다.
이들은 다소 위험하지만 해로와 육로를 이용한 2단계 계획을 세웠다. 1차로 안씨 일가족이 신의주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김씨 가족은 육로를 통해 적당한 지점으로 이동한 뒤 합류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중간 기착지는 평소 고기잡이를 위해 자주 드나드는 평북 철산군의 동천수산부 업선부두로 최종 결정했다. 도중에 북한 경비정에 걸리더라도 의심을 덜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D데이가 결정됐다. 운명의 날짜는 9일. 안씨 일가족이 먼저 배로 신의주를 출발했고 김씨 가족은 같은 날 자동차편으로 동천부두를 향해 출발했다.
10일 밤 9시경 안씨는 무사히 부두에 도착했다. 평소 어선들이 자주 다니는 길이어서인지 북한 해군 경비정의 검문도 없었다. 기다리던 김씨 가족이 배에 올랐다.
두 가족은 11일 낮1시경 동천부두를 떠났다. 그러나 남행을 위해서는 야음을 틈타는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동천 앞바다의 탄도에 정박, 4시간 가량 기다린 뒤 밤8시경 출항했다.
남한으로 직항하는 것은 위험했다. 일단 중국 산동반도쪽으로 선수를 틀기로 했다. 공해로 나가 중국 어선단에 섞이는 것이 안전했다. 북한 레이더에 잡히더라도 중국어선으로 위장할 수 있다는 판단때문이었다.
7시간을 항해하자 바다위에 드문드문 떠있는 중국어선들이 보였다. 공해상으로 북한경비정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해역이었다.
배의 방향을 다시 틀었다. 동남방을 향해 전속력을 냈다. 이대로 무사히 가면 남한 영해였다. 그러나 기상이 갑자기 악화됐다. 안개와 함께 비가 내리면서 파고가 3∼4m에 이르렀다. 파도에 어선의 앞머리가 파손된 듯했다. 배가 침수되는지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온 가족이 필사적으로 물을 퍼내며 파도를 헤쳤다. 9시간가량 항해한 듯했다. 멀리서 태극기를 단 낯선 군함이 나타났다.
당시 부근해역을 초계중이던 해군호위함 「부천함」이었다. 부천함은 북방한계선(NLL)인근 공해상에 떠있던 중국 어선단에서 한 점이 튀어나와 우리 영해로 진입하는 모습을 레이더로 포착, 이 점을 향해 가던 중이었다.
12일 오후 4시28분 백령도 서남쪽 5.7마일지점이었다. 바로 거기에 자유가 기다리고 있었다.
〈황유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