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국어의 로마자표기법에 대한 공청회를 참관했다. 정보화 시대에 살면서도 우리는 아직 사용자 위주의 배려를 하는데 아주 미숙하다는 점을 통감했다. 현재의 형태음소적 한글맞춤법은 사용자(독해자)의 입장을 위해 표기자가 많은 노력을 들여 복잡한 받침까지 써넣는 방식이다. 다수의 독자가 소수의 표기자 덕을 보는 경우다. 반면 뜻을 독해할 입장이 아닌 외국인들을 위해서는 표음 위주의 로마자표기법이 효과적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발음한 결과를 우리가 쉽게 알아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표음 위주의 표기법은 소수의 노력으로 많은 사용자가 덕을 보게 되므로 기록해내기에 쉽지 않은 점이 있어도 감수해야 한다. 공청회에서 많은 분들이 ㄲ을 현행 kk보다 gg로 하자는 등 글자 선택에는 열을 올렸다. 하지만 현행안을 포기하면 단순히 글자만 바뀌는게 아니라 표음 위주의 원칙마저 없어진다는 점을 놓쳤다는 생각이다. 누구에게 물어봐도 자음동화 중화현상 등을 반영한 현행 표음주의 표기법이 원발음을 재현해내는데 탁월하다고 인정할 것이다. 로마자표기법이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다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도로표지판 도서관목록 여권 영어논문 등에는 한글을 옆에 함께 쓰는게 관례다. 말하자면 이같은 용도로는 현행 로마자표기 부분이 발음기호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완벽한 기호체계란 어차피 불가능하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정도의 역할이면 충분하다. 설령 새로 제안된 개정안을 쓴다 해도 결과는 한글을 이중으로 적은 꼴밖에 안된다. 이번 개정의 불씨는 표음 위주의 현행안이 1대1 대응을 이용하려는 전산작업에는 부적합하다는데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모든 문제를 사용자 위주로 처리하는 슬기를 발휘했으면 한다. 로마자표기법이 용도의 완연한 차이에 따라 두가지로 나눠지면 안된다는 법도 없지 않은가. 「전산자료 처리용」이라는 조건으로 새로 제안된 개정안을 병용할 필요가 있다. 다만 새 제안 가운데 제2안을 보면 「ㅔ」를 e에 배정해 표음적 배려를 한 반면 「ㄹ」은 r와 l을 모두 쓰게 하는 등 표음 위주로 하지 않았다. 결국 제1안과 서로 뒤바뀐 자기모순을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발언하지 않고 있자니 로마자표기법 개정으로 도로표지판 교체에 2백90억원의 아까운 세금을 낭비해야 하고 외국에서 고군분투하는 도서관 한국사서들을 망연자실하게 할 현실이 안타깝다. 이상억(서울대교수·국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