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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경씨 소설「낯선 천국」 『무기력한 인간 群像』그려

입력 | 1997-05-15 08:49:00


회사원 김(金), 대학생 이(李), 말년 병장 박(朴). 이름도 없이 등장하는 장삼이사(張三李四) 세 사람이 올해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을 심각한 블랙 코미디로 만들고 있다. 수상작은 책이 가득한 서가를 종일 오가는 교보문고 직원 김호경씨(35)가 쓴 「낯선 천국」. 김씨는 술을 일절 못한다. 집에 가면 못 박고 톱질하고 형광등 고치고 아기와 놀아주는 가정 모범생이다. 원광대에 다닐 땐 토목공학을, 경희대 대학원에 다닐 땐 출판편집을 공부했다. 교보문고엔 「책을 많이 볼수 있지 않을까」해서 입사했고 가끔 홀에서 「작가와의 대화」가 있으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러다 어느날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이유는 지하철 때문. 『출근 때 저는 1호선 오른쪽 문으로 타서 왼쪽 문으로 내립니다. 두 문 사이 간격은 2m 가량. 사람들이 무진장 많을 땐 이 거리를 통과 못해서 역을 지나칩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무기력을 확인하는 인간, 이게 우리 표정이 아닐까요』 등장인물 김은 택시기사로부터 받은 드링크제를 마시고 환각증세를 보인다. 쾌감을 맛본 그는 드링크제 파는 아줌마를 찾아나선다. 곧 도둑이 된다. 아르바이트로 대형서점 책도둑잡기를 하던 이는 지하철 선로에 놓인 지갑을 줍다가 불한당들에게 유인돼 마약주사를 맞는다. 정신이 돌아버린 그는 남자화장실 지갑털이가 됐다가 여자화장실을 노리기 위해 여장을 한다. 그(녀)의 범법을 목격한 치한에 끌려 여관 침대에 누워 있다가 바지를 벗는 치한에게 절규한다. 『난, 주사가 싫어』 박은 서울역 앞에서 한 여성으로부터 최음제가 든 사탕을 받는다. 곧 사창가를 찾아가지만 자신이 왜 짐승이 됐는지 이유를 모른다. 주술관계가 분명한 단문으로 이뤄진 작품은 선명한 이미지들로 메워졌다. 세 사람의 스토리라인은 서로 만났다가 떨어지곤 한다. 아이로니컬한 상황들이 읽는 이를 비실비실 웃게 하지만 사회적 의미를 떠올려보면 섬뜩하다. 아차, 하는 순간 미지의 운명과 조우하지만 결코 거기서 헤어날 수 없음을 알고 불안에 떠는 현대인의 표정, 그것이 「낯선 천국」의 세계다. 〈권기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