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베르나르 지음/열화당 펴냄) H에게 잘 지내는지? 오늘은 책 이야기를 좀 할까 해. 흑백의 세계에 갇힌 사람에게 총천연색으로 화사하게 꾸며진 그림책이 밀실의 답답함을 조금은 덜어줄까 기대하면서 그대에게 보내는 책들을 골랐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 면회를 마치고 돌아와 세잔느를 다시 읽었지. 여전히 저릿저릿하고 재미있더군. 가끔씩 하하 깔깔, 집이 떠나가라 크게 웃어젖히며 페이지를 넘겼지. 화단의 후배이자 세잔느의 열렬한 찬미자인 에밀 베르나르가 엑상 프로방스를 방문하여 한달간 그와 함께 지냈던 생활을 성실히 기록한 이글은, 난해하기로 악명높은 세잔느를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귀중한 일차자료이지. 나 또한 그런 야무진 꿈을 갖고 이 얄팍한 책자를 뒤적거렸지. 세잔느가 그린 사과가 왜 그리 단단해보이는지 그 비밀을 캐고 싶었거든. 그러다 뜻밖에도 내가 만난 건, 주변의 어느 누구에게서도 이해받지 못한채 자신의 길을 살다간 한 고독한 영혼의 초상이었어. 비평가들의 냉대에 좌절했던 젊은 시절, 그와 중학교 동창이며 당시 잘 나가던 소설가 에밀 졸라가 소설 「작품」에 나오는 무능한 화가 클로드의 모델로 자신을 이용했다며 분개하는 세잔느. 『예술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 예술에 집착하는 것만큼 무서운 일은 없다네』 졸라의 이 말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겨 그후로 죽을 때까지 세상과 인간을 등지며 살게 만들었지. 자신을 둘러싼 여자들이 모두 그를 유혹하려 호시탐탐 노린다는 성적 강박관념에 평생 시달렸던 남자가 여기 있어. 중년의 하녀에게 자기 앞을 지날 때는 치맛자락으로도 건드리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는 세잔느의 신경과민은 거의 환자의 수준이지. 왜 누드 모델을 쓰지 않느냐는 질문에 『나같은 나이에는 여인을 그리기 위해 옷을 벗기는 일은 삼가야만 한다네』라고 대답했던 그는 극단적인 예절의 노예였지. 스승이 죽은 지 십오년 뒤 다시 엑상프로방스를 찾아온 저자의 감회를 서술한 마지막 부분이 특히 감동적이지. 나도 그처럼 세잔느의 체온을 느끼며 언덕을 오르고 싶어. 남프랑스의 따뜻한 햇살을 듬뿍받고 걸으며『산다는건 끔찍한 일이야』라고 중얼거려야 했던 인생의 모순을 껴안고 싶어. 최영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