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놓이더라도 자기 자존심은 지킬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지금 시대에 새삼스레 고향을 들먹이는 게 어쩐지 쑥스러운 감이 없지 않지만 요즘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고향 의식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내 마음은 아스팔트만큼이나 황량해진다. 우리 아이들이 메마른 풍경 속에서 자라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 정서 메마른 우리 아이들 ▼ 문학 및 사회과학 서적을 전문으로 하던 나는 얼마전 조그맣고 색다른 변화를 시도했다. 민음사의 자회사로 아동도서 출판사를 새로 출범시킨 것이다. 회사 이름을 두고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다가 내가 자란 마을의 이름을 따서 비룡소(飛龍沼)라 했다. 말 그대로 조그만 개울에서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을 가진 곳으로 우리나라 각 고장에선 흔히 있는 이름이다. 용이 꿈꾸는 연못, 비룡소에서 책이 처음으로 나오던 날 어린 시절이 문득 생각나면서 감회가 새로웠다. 그동안 우리 출판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한 것은 사실이다. 연간 출판종수는 4만여종에 달하며 외국의 최신간도 저작권 계약을 통해 발빠르게 한국의 독자들과도 만나고 있다. 또한 그동안 출판의 사각지대로 놓여 있던 전문분야 책들의 출판도 활발해지고 있다. 어렵고 딱딱하다는 선입견을 가지게 마련이라서 일반인이라면 접근하기 어려웠던 과학도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내며 독자들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저술가 또한 다방면으로 확대돼 우리 사회가 지닌 지적(知的) 에너지가 상호 교환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보완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목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흔히들 출판의 유통문제를 많이 거론하지만 엄밀히 말해 우리는 그동안 유통의 반쪽에 대해서만 말한 것은 아닐까. 출판사에서 서점까지의 유통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뿐, 정작 중요한 서점에서 독자까지의 그것은 논의 밖이었다. 유통 현대화를 위해서는 서점은 전문화, 대형화돼야 한다. 서점공간이 늘어나면 그만큼 독자도 확대돼 왔던 게 그동안의 경험으로 입증됐다. 이는 새로운 고용창출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유휴 노동력도 흡수하는 사회적 효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서점은 책만을 사고파는 단순한 시장의 기능에서 벗어나 복합적 문화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쾌적한 분위기에서 책이 내뿜는 문화의 향기를 흠뻑 만끽하는 장소가 돼야 한다. ▼ 책방이 놀이터 되도록 ▼ 한편 아동출판 분야는 지적 눈뜸이 시작되는 출발점으로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이미 현대 기계 문명에 젖을 대로 젖은 우리 아이들의 상상력과 정서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싸늘한 컴퓨터와 미끌미끌한 플라스틱제 로봇에 그 일을 맡길 수는 없을 것이다. 한 인격이 새로운 자아를 체험하며 세계관을 형성하며 다시 태어나는 것은 책이 감당하는 큰 몫이기도 하다. 내가 가진 소박한 꿈의 하나는 책방이 아이들의 즐거운 놀이터가 돼 격조있는 책읽기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공간으로 동네마다 생겼으면 하는 것이다. 이미 몇몇 아동전문서점이 탄생해 아이와 부모로부터 상당한 호응이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하지만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 이처럼 전문화된 서점이 마을마다 고루 자리잡게 되면 아동도서의 질적 수준이 높아지는 자연스런 계기도 될 것이다. 부모와 함께, 친구들과 함께 널찍한 책의 숲으로 소풍나온 우리 아이들의 정신의 키가 쑥쑥 자라나기를 기대해 본다. 박맹호(민음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