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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론]이문열/제 칼에 찔린 「文民」

입력 | 1997-05-28 20:16:00


요즘의 정국을 보면 商君(상군)의 낭패가 떠오른다. 상군은 형명학(刑名學)으로 진(秦)나라를 부강하게 한 공손앙을 높여부르는 이름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엄한 법시행으로 상하(上下)의 미움을 사다가 마침내 쫓기는 몸이 됐다. 함곡관 아래에 이르러 한 객사에서 쉬고자 하였으나 그를 알아보지 못한 그곳 사람이 말했다. ▼ 겪어야할 개혁의 아픔 ▼ 『상군의 법에 여행권 없는 자를 유숙시키면 처벌을 받습니다』 이에 상군은 쓸쓸히 탄식했다. 『아, 법의 폐해가 마침내 내게도 이르렀구나』 또 일설에는 그가 목숨이 위급한 상황에서 성문을 빠져 나가려 했으나 수문장이 말하기를 『해가 뜨기 전에 성문을 열면 상군의 법에 따라 죽게 됩니다』하고 열어주지 않아 끝내 사로잡혀 수레에 몸이 찢겼다고 한다. 물론 문민정부의 사정(司正)이나 역사바로세우기를 상군의 형명과 같은 차원에서 다룰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이 뽑은 칼에 자신이 상하게 된 점에서는 유사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돌이켜 보면 지난 4년동안 개혁의 칼날은 너무 많은 사람을 베었다. 청산해야 할 구시대의 유산이라지만 이같이 짧은 기간에 그토록 많은 장군과 장관과 국회의원과 재벌과 공기업의 장(長)들이 상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소급입법까지 해가며 우리가 겪었던 그 어떤 혁명보다 더 철저한 청산을 해왔다. 그리고 이제는 그 마지막 단계, 권력창출의 기반이 된 대선자금으로 칼날이 옮겨졌다. 시대상황과 무관한 악(惡)은 드물고 정치와 연관된 악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당자의 억울함에 동정하거나 개혁의 무자비함을 비판하고 싶은 의도는 추호도 없다. 당시에는 관행이었다 하더라도 용서못할 죄악은 마땅히 처벌돼야 한다. 우리 사회가 거듭나기 위해서는 겪어야 할 아픔이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은 그 마지막 순간에서의 머뭇거림이다. 대통령은 대선자금의 공개를 약속했다가 취소하더니 다시 30일로 날을 잡았다. 그것도 구체적인 내용공개는 없으리라는 단정적인 관측들과 함께. 지금까지의 경과로 보아 대선자금 공개는 그동안 지속적으로 추구돼온 개혁의 마무리 작업이다. 이로써 과거의 그릇된 정치관행은 근원적으로 척결되고 우리 사회는 온전히 거듭나게 된다. 거기에 부정과 불법이 있었다면 달게 처벌받으라. 그것은 개혁의 대의를 위한 정치적 순사(殉死)다. 죽음으로써 오히려 사는 길이다. ▼ 「告白」으로 참 마무리를 ▼ 국민에게도 눈과 귀가 있고 짐작이 있다. 여기서 더 머뭇거리면 두번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보다는 솔직하게 털어놓고 이해를 구하라. 그리고 야당에도 강력하게 대선자금의 공개를 요구하라. 공개를 회피하면 자신에게와 똑같은 무자비함으로 수사하라. 그때에는 아무도 그걸 정치보복으로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들이 보기 싫어하는 것은 대선자금 공개회피로 당할 대통령과 여당의 낭패뿐만이 아니다. 규모의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는 똑같은 구조의 대선활동을 했으면서도 큰 호기나 만난 듯 설쳐대는 야당도 보기 싫기는 마찬가지다. 대권에 눈멀어 산적한 국내현안들은 제쳐놓고 김칫국부터 마셔대는 그들에게도 섬뜩하게 반성하고 참회할 기회를 주라.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