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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심칼럼]6월, 그날의 함성

입력 | 1997-06-06 20:17:00


6월이다. 10년 전 6월10일 그날의 함성이 귀에 쟁쟁하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시울이 달아오른다. 그날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선언했다. 『세계의 양심과 이성이 우리를 격려하고 민주제단에 피뿌린 영령들이 우리를 향도하며 민주화의지로 사기충천한 온 국민의 결의가 큰 강줄기를 형성하니 무엇이 두려운가. 자! 이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찬연한 민주새벽의 그날을 앞당기자』 ▼ 할머니까지 나선 항거 ▼ 그날 오후 6시 경찰의 원천봉쇄로 겹겹이 둘러싸인 서울 성공회대성당에서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선포하는 애국가와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그와 거의 동시였다. 광화문과 시청앞 일대는 갑자기 아스팔트를 질주하는 자동차들의 경적소리에 파묻혔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독재의 총칼 앞에 30년 가까이 몸을 굽혔던 국민들이 원한에 사무쳐 일제히 일어선 것이다. 그날 불꽃이 작렬하는 다탄두 최루탄과 페퍼포그가 뿜어내는 자욱한 가스 연기 속에서 학생과 시민은 어깨에 어깨를 겯고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와 「우리의 소원은 민주」를 노래했다. 10대 소녀에서부터 60대 할머니들까지 대열에 뛰어들어 눈물을 흘렸다. 최루탄 가스 때문만은 아니었다. 모두가 역사 앞에 하나 된 기쁨, 억눌리다 억눌리다 비로소 떨쳐 일어선 감격과 회한때문이었다. 그날의 성난 파도는 명동성당 농성투쟁으로, 6.18 최루탄 추방대회로, 6.26 평화대행진으로, 백만인파가 서울시청앞 광장을 구름처럼 덮은 7월9일의 이한열군 장례식으로 이어졌다. 너도 나도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다짐했다. 그것은 살아남은 자의 수치와 분노가 독재자에게 던지는 마지막 항거였다. 박종철군과 이한열군, 그리고 가슴 속에 깊이 묻어둔 80년 광주의 민주영령들에 대한 산 자들의 속죄였다. 10년 전 6월의 민주항쟁, 그것은 60년 4.19 이후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서울 부산 광주 인천 대전 등 전국 곳곳에서 민주의 횃불이 타올랐다. 그날의 항쟁으로 우리는 단번에 절망의 늪에서 희망의 기슭으로 올라섰다. 연령 직업 계층 종교를 초월한 그 비폭력투쟁을 통해 민족 대통합의 감격을 맛보고 무너져 내리는 군사독재를 장송(葬送)했다. 그러나 6월의 불꽃은 다 타지 못하고 꺼졌다. 4.19는 5.16으로 배반당했지만 6.10은 6.29를 쟁취했다. 국민의 저항에 밀린 지배세력은 6.29로 위장항복하고 6.10을 무장해제했다. 민주세력은 분열하고 선거혁명은 실패했다. 그리고 10년이 흐른 지금 권위주의는 청산되지 않았고 군부독재의 유산인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는 펄펄 살아 있다. 한보사태 김현철비리 대선자금의혹 등이 그 아픈 증거다. ▼ 金대통령의 「원죄」 ▼ 10년 전 이한열군 장례식이 끝난 직후 당시 통일민주당 金泳三(김영삼)총재는 말했다. 『국민 다수가 바라는 바를 신속하게 충족시켜주는 것이 정치의 요체입니다. 정치인은 절대 솔직해야 합니다. 이 정권이 오늘의 상황에 이른 가장 큰 이유는 부도덕성 은폐 진상조작을 일삼아 왔던 데 있습니다. 잘못을 시인할 용기가 있고 국민에게 공개할 줄 아는 정부라면 절대 지지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얄궂다. 6월항쟁의 한 주역 김영삼대통령은 10년 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아야 할 딱한 처지에 서 있다. 그의 원죄는 6월항쟁을 6.29로 포섭한 권위주의세력과 손잡고 대통령에 오른 3당합당에 있었다. 6월, 그날의 함성에 담긴 알맹이를 찾아야 한다. 김종심(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