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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에세이/21세기 앞에서]3천만원짜리 도마

입력 | 1997-06-17 19:48:00


일본에는 「히노키」란 나무가 있다. 히노키는 강수량이 많은 일본의 한 지방에서만 자라는 고유수종이다. 다 자란 히노키의 키는 30m가량 된다. 이 나무는 생김새가 독특할 뿐 아니라 가지 끝에 달리는 조그만 갈색 방울과 얇게 세로로 벗겨지는 붉은 껍질이 있어 어느 것 하나 인상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미래산업의 중요성그렇지만 이 나무는 일년에 겨우 25㎝밖에 자라지 않는다. 그러니 다 자라려면 약 1백년이 걸리는 셈이다. 대신 이같은 오랜 기다림의 시간은 그만한 값을 한다. 그윽한 향과 견고성은 아주 비싼 고급 가구를 만드는데 이상적이어서 장인(匠人)들은 오래 전부터 그 가치를 높게 인정하고 있다. 한 예로 히노키로 만든 요리용 도마 하나의 가격이 무려 3천만원을 호가하고 있을 정도다. 기업도 「저성장 고기술」의 시대인 21세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히노키와 같은 고부가가치형 수종사업(樹種事業)을 보유해야 한다. 사실 지금 세계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선진기업들의 성공비결도 알고 보면 히노키같은 수종사업을 남보다 앞서 발굴하고 진출한데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업들의 현실은 그렇지 못한 듯하다. 히노키는 찾아보기 힘들고, 치수(治水)역할과 땔감으로서의 가치밖에 없는 잡목과도 같은 사업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 실상이다. 이제 모든 기업들이 미래형 사업구조로 시급히 전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적어도 20년 후까지의 사업전개도를 만든다든지 하여 미래전략을 사전에 정리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시류에 따라 흔들리지 말고 장기적으로 일관된 사업전략을 추진해야 한다는 의미다. 일본전기(NEC)가 컴퓨터와 통신을 두 축으로 하는 C&C개념을 제창하여 미래의 사업전략을 대내외에 명확하게 인식시킨 것은 좋은 예다. 새로운 사업에 진출할 때도 사업 자체의 타당성만을 분석하기보다는 그 사업에의 진출이 기존사업에 어떤 효과를 미치는지, 기업의 비전과 대비하여 전략적 일관성이 있는지 등을 분석해야 한다. 단순히 외형을 키우기 위한 다각화보다는 사업간의 시너지효과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전개해야 한다. 한편 전략적으로 결정된 수종사업에 대해서는 히노키를 키우는 마음으로 집중투자해야 한다. 수종사업의 중요성에 대해 조직내 공감대를 형성하는 한편 핵심인력을 투입, 사업의 추진력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모토롤라의 용기반면 이미 경쟁력을 상실한 만성적인 적자사업에 대해서는 포기의 미학을 발휘할 줄도 알아야 한다. 나무가 잘 자라게 하기 위해 가지치기를 해주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모든 사업은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아서 출생 성장 성숙 소멸이라는 순환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므로 신규업종이 탄생하고 쇠퇴업종이 정리되는 것이 순리(順理)다. 반도체 통신기기 가전제품사업에 집중해오던 모토롤라는 1970년대에 일본기업들이 원가경쟁력을 앞세워 공격을 해오자 TV 라디오 등 부가가치가 낮은 가전부문을 과감히 포기하고 반도체와 통신에만 경영력을 집중했다. 그 용기 때문에 모토롤라는 오늘날의 초일류기업으로 거듭 날 수 있었음을 우리 기업들은 상기해야 한다. 이건희(삼성그룹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