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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지의 세상읽기]재택근무 「뒤집어 보기」

입력 | 1997-06-21 08:12:00


남편은 직장에,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나면 나도 내 작업장으로 향한다. 부엌 옆의 원형나무식탁이다. 집전체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다. 대문 전화 팩스 그리고 부엌의 모든 일을 가장 동선(動線)이 짧게 관장할 수 있는 곳이다. 세탁기와 전자레인지의 마감 「땡」소리는 듣고도 안 일어나도 큰일이 없지만 냄비와 주전자 몇개를 까만숯으로 만든 뒤에는 가스레인지의 타이머 알람소리를 집이 쩌렁 울리도록 최대로 높여 맞춰놓았다. 조간신문과 커피와 아침식사의 흔적을 치운 식탁위에 원고지 노트북 필기도구 온갖 자료와 잡다한 읽을거리를 꽉차게 늘어놓으면 나의 소위 재택근무의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전화벨소리. 『오, 집에 있네』 오랜만에 전화하신 작은 시누님. 병원에 계신 큰누님일을 비롯한 집안문제, 조카의 혼사건, 친목계, 당신의 여행 등에 대해 약 40분간 담소. 가스점검, 우유값 수금으로 대문을 두번 열고 목 좋은 땅을 소개해 올리고자 한다는 부동산중개인, 그리고 역시 오랜만인 친구의 전화 두통. 재택근무자에게 전화자동응답기와 방문객식별 비디오장치는 필수품이구나. 그런데 그게 잘 안 사진다. 오후. 부엌창 밖으로 슈퍼마켓봉지를 들고 들어오는 이웃주부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이의 도시락반찬과 얼큰한 국물이나 찌개같은 것이 없으면 밥을 잘 못먹는 남편을 생각하며 냉장고 속을 살펴보고 손지갑 챙겨들고 대문 밖으로 나간다. 어머니가 계시는 날에는 안방에 쏙 들어가서 글을 쓸 수가 있지만 그런날이라도 시장길은 내가 꼭 나선다. 더구나 양질의 단백질부족이 치매 원인중의 하나란 말을 듣고는…. 어느 수필집에선가 재미있게 읽은 글 한토막. 「일하는 여자에게 필요한건 남편이 아니고 아내다」. 재택근무 하는 남편은 얼마나 좋을까. 어느날 아내가 전업주부인 중견방송극작가 K씨에게 말했다. 『좋으시겠어요. 방에서 글쓰고 있으면 아내가 「여보 진지 드세요」하면 나가서 냠냠 먹고 또 방에 들어가 글 계속 쓰면 문이 살짝 열리며 아내가 커피나 과일같은 것 들고 올거 아니에요』 내가 말하는 동안 내내 희한한 표정을 짓고있던 K씨. 『거 모르는 소리 말아요. 마누라가 아침에 바이바이 하고 나가면 얼굴은 오후 늦게나 봐요. 점심은 꼭 동네식당 가서 먹는데 홀아비나 노총각으로 보였는지 식당여주인이 하루는 참한여자 소개시켜 주겠다고 하더라니까』 거, 참. 또 그렇구나. 최연지〈방송극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