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의 일이다. 우리는 전형적인 한옥동네에 살고 있었다. 지대가 높아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높은 계단이 나왔다. 우리는 그 윗동네를 산동네라고 했는데 언제부터인지 산동네에 마이크가 설치되고 아침부터 잘 살아보자는 새마을 노래가 터무니없이 큰 소리로 온동네를 압도했다. 새벽에 그 소리에 잠이 깨면 태양이 아무리 높게 떠도, 햇살이 아무리 눈부시게 쏟아져도 암담한, 살 맛이 싹 가실 정도로 암담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다. 잘 살아보자는데 왜 그렇게 듣기가 싫었을까. 너무 고압적이고 일방적이고 반복적이고 천박스러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너희들이나 실컷 잘 살아라, 이런 부아가 저절로 치밀었다. ▼ 살얼음판 같던 70년대 ▼ 선거때였다. 유신시절엔 대통령도 우리 손으로 뽑지 못했으니까 아마 국회의원이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였을 것이다. 투표를 안하는 게 그 때 우리처럼 이불 속에서 활개치는 재주밖에 없는 소심한 소시민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반정부투쟁이었다. 우리는 여덟 식구나 됐는데 막내 빼고는 다 유권자였다. 반장은 아침부터 투표에 한 사람도 빠지지 말라고 성화를 했다. 아무 죄없는 반장의 성화를 앉아서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우리 식구는 각각 외출해버렸다. 집엔 고등학생 막내와 노환중인 시어머님만 남았다. 투표시간이 지나서 귀가해보니 반장의 성화와 위협적인 마이크소리에 가물가물하는 의식 속에서도 투표를 안하면 집에 무슨 화가 미칠까봐 잔뜩 겁을 내신 노인이 손자에게 애걸을 하다시피 하여 투표소까지 업혀 가셔서 투표를 하고 오신 뒤였다. 그때의 치 떨리는 분노와 참담한 패배감을 어찌 잊을까. 그 시대가 그렇게 싫었던 것은 잘 살아보자는 구호 때문만은 아니었다. 살얼음판 같은 세상이었다. 학생이나 근로자, 말깨나 하는 지식인들이 툭하면 붙들려 들어가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간첩이나 그와 비슷한 불순세력이 되어 오라를 지거나 징역을 살거나 해직이 되었다. 딸의 고등학교적 선생님 한분도 무슨무슨 당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더니 어느날 같은 죄목의 두 사람과 함께 사형에 처해졌다. 아주 좋은 선생님이어서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 혐의가 사실이라 해도 인간의 목숨인데 어떻게 선고에서 사형이 집행되기까지가 그렇게 신속할 수 있는지 실로 눈 깜짝할 새였다. 김영삼정권에 실망했다고 해서 곧바로 박정희시대를 그리워하는 말을 하는 걸 들으면, 나처럼 소심한 사람은 가슴이 다 덜컥 내려 앉는다. 그 후 지금까지 더디지만 그래도 쉬지 않고 발전시켜온 민주화를 세상이 온통 살얼음판 같고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같던 절대권력시대로 되돌려 놓고 싶어하는 소리처럼 들려서다. 박대통령이 개인적인 치부를 안했다는 게 그 시대를 그리는 향수의 핵심인가 본데, 그 때도 정보계통을 비롯해서 그 분의 권력을 확실하게 뒷받침하는 세력들은 얼마나 엄청난 재산을 축적했는지는 왜 잊어 버리나. ▼ 「박정희향수」 가슴 철렁 ▼ 그 시대를 분기점으로 우리가 비로소 굶주림에서 벗어났다는 공(功)도 인정해야 한다는 소리에는 나도 동감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박대통령이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고, 그 정권을 보필하기도 하고 아부하기도 한 세력들이 한 번도 척결되거나 도태됨이 없이 지금까지 능력껏 꾸준히 고위공직에 머물러 있거나 정치일선에서 뛰고 있으면 됐지 더 어떻게 그 시대를 인정하고 용서하란 말인가. 용서와 망각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용서는 하되 잊어버리지는 말자. 박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