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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타]고요한「불의 여인」최명길,「용의 눈물」 열연

입력 | 1997-06-27 07:18:00


《시대가 영웅도 스타도 낳는다. 그러나 시대를 읽지못하는 영웅,시대를 담아내지 못하는 스타가 존재할 수 있을까. 그들은 대중의 정서속에 똬리를 틀고 꿈의 양식을 공급한다. 그래서 당대 수많은 사람들의 갈증에 타는 목을 축여주고 꿈을 대변하는 길라잡이가 된다.우리,우리들의 얼굴과 사회를 비춰주는 대중문화스타들을 만나본다.》 왕비병. 인형의 집 커튼 뒤에서 꿈을 앓는 가냘픈 공주병 따위가 아니다. 훨씬 더 거칠고 우악스런 현실에서 남자와 세상을 휘둘러 보겠다는 앙증맞은 열망의 병. 『나으리! 결단을 내리시옵소서. 소첩은 이 나라 제일의 여인네가 되고 싶사옵니다』 악문 입에서 터져나오는 소리. 이글이글 불타는 눈망울이 브라운관 밖으로 요기(妖氣)마저 뿜는 것 같다. KBS 1TV 드라마 「용의 눈물」의 최명길(35). 이방원의 처 민씨 역을 맡고 있는 그는 요즘 『어쩌면 그렇게 진짜같으냐』는 말을 듣고 산다. 심지어 박찬종 신한국당고문은 그를 「왕비마마」라고 부를 정도. 역(役)을 꾸며내는 배우는 스타가 아니라던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의 말이 딱 맞는다. 그렇게 보면 그의 가려져 있던 「왕비병」이 불꽃처럼 터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성취욕의 불덩어리를 품고 있으면서도 암팡지게 자신을 추스르며 겉으론 차갑게 위장해온…. 위선적 고요함인가, 아니면 작위적 세련됨인가. 의심의 눈을 가늘게 뜨는 기자에게 말했다. 『어려서부터 내가 평생 아껴야할 것은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열마디를 하는 대신 다섯마디만 하면 내 안의 에너지를 안뺏길 수 있거든요. 그러다보니 어려서부터 분위기있는 여자라는 얘기를 들었나봐요』 83년 데뷔이래 최명길이 주로 맡아온 배역도 그랬다. 차분하고 우아한 도회적 감각의 여자. 94년 TV심야음악프로 「음악이 있는 곳에」서는 꿈속을 함께 걷는 듯한 분위기로 기혼남성들의 감수성을 흔들어 놓았다. 스펀지처럼 바깥의 에너지를 빨아들여 세상이 놀랄만큼 힘차게 뿜어낼 것만 같은 마성(魔性)의 기운조차 엿보였다. 바로 그해 94년 최명길은 드라마 「결혼」과 영화 「장밋빛 인생」 등으로 프랑스 낭트영화제 여우주연상과 국내의 내로라하는 상을 10개나 거머쥔채 이듬해 작가 김한길씨와 싹 결혼해버렸다. 지난해 김한길씨가 국회의원이 된뒤 최명길도 「자연스럽게」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아침이면 조간신문을 읽고 요약해준다. 『남편이 이를테면 대통령을 하겠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최명길은 잠시 주저하다가 『남편이니까 당연히 도와야죠』했다. 김씨가 청혼하면서 『당신을 영부인으로 만들어주겠소』하는 말에 응했다는 소문이 맞느냐고 짐짓 떠보자 생전 처음 듣는다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깔깔 웃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예전같으면 강하고 독한, 심지어 남자보다 판단이 빠르고 격해 욕먹기 꼭 좋은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요즘 최명길은 그때문에 뜨고 있다. 나이든 계층까지 박수를 보내고 강연요청도 쏟아진다. 왜? 『여자를 보는 눈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주체적이고 적극적이면서 「남자를 만들 수도 있는 여자」를 원하는 사회적 흐름과도 맞는…』 대통령선거를 앞둔 97년이라는 시기가, 「여성의 세기」라 일컬어지는 21세기를 앞둔 지금 이 시대가 그와 같은 여성상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에는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 지극히 여성적이면서도 내면의 남성성, 즉 애니머스(Animus)를 갖춘 양성성의 인간형이 바로 민씨라는 것. 그러나 그런 여걸을 감당하고 싶지 않았던 6백여년전의 조선, 야사는 그를 「억세고 못생겼다」고 썼다. 20세기말의 최명길에게는 지적 단아함과 미모가 있다. 자신이 선택한 일은 해낸다는 당찬 기질도 있다. 그래서 그는 우리시대 스타로 꼽힐만한 자격이 있다. 〈김순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