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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에세이/21세기 앞에서]中企 위하는 대기업

입력 | 1997-06-28 20:19:00


양산조립(量産組立)업을 주축으로 하는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협력회사를 제외하고 대기업의 경쟁력을 논할 수 없다. 우선 독자적으로 제품을 완성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자동차의 경우 부품이 2만개, VTR가 8백∼9백개인 것을 감안하면 70∼80% 이상은 중소기업에서 생산되는 부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또한 제품이 생산돼 고객에게 전달될 때까지 거치게 되는 수많은 공정중 상당부분을 협력회사가 담당하게 된다. ▼ 공동운명체로 인식 ▼ 만약 어느 한 곳에서 불량이 발생하면 그동안 투입된 부품 노동력 자금 등의 경영자원을 버려야만 하는 손실이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구매를 예술의 차원으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많은 대기업들은 중소기업을 하청(下請)업체라 부르며 마치 상전이 부하를 대하듯 해왔다. 지금도 환갑이 넘어보이는 중소기업 사장이 새파랗게 젊은 사원이나 간부에게 거래대금을 받기 위해 굽신거리는 장면을 가끔 볼 수 있다. 중소기업을 공존공영의 동반자가 아닌 원가절감의 대상으로서만 인식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수직관계에서 비롯된 일방적인 거래는 대기업에도 커다란 손실을 가져왔다. 마지못해 가격을 인하하고 낮은 마진을 감수해야 했던 중소기업들은 「그저 검사에만 안걸릴 정도로 적당히 넘어가자」는 생각에 빠지게 됐다. 또 품질향상에 대한 동기부여가 적었기 때문에 높은 불량률과 납기지연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결국 대기업은 품질에 대한 고객의 신뢰와 당장 손에 잡히는 원가절감을 맞바꾼 셈이 됐다. 이제부터라도 중소기업은 고객만족과 품질향상을 위해 함께 뛰는 「2인3각」의 파트너로서 위상이 재정립돼야 한다. 하청업체가 아니라 「자식까지 대를 물려가면서 거래하는」 공존공영의 협력회사로 자리매김이 돼야 한다. 이를 위해 대기업은 하드적인 자금지원은 물론 소프트적인 정보제공 기술지도 경영컨설팅까지 해주어야 한다. 일본에서는 검사과 검품과라는 부서가 점차 없어지고 있다. 애당초 불량이 발생하지 않도록 협력회사를 지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협력회사라고 무조건 감싸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불량을 눈감아주는 것은 고객의 입장에서 보면 범죄를 함께 저지르는 공범자의 자세와 하등 다를 바 없다. 자율과 경쟁이라는 원칙하에서 「배우자를 얻는다」는 마음가짐으로 협력회사와 동반관계를 맺어야 한다. ▼ 정부도 적극 지원을 ▼ 정부차원의 지원도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정치논리에 의한 과보호장치보다는 대기업과의 실질적인 협력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 부동산 담보위주의 대출제도도 시급히 개선돼야 할 과제다. 경영자의 생활철학 신념 기술의 깊이를 고려하여 대출해주는 선진국에 비한다면 우리나라의 금융관행은 아직도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한편 중소기업의 경영자도 장인정신과 프로정신을 발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경영자」라는 기업가정신을 길러야 한다. 품질개선과 기술개발에 노력하여 대기업이 「제발 제품을 쓰게 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일류 중소기업이 되는 것이다. 이건희(삼성그룹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