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하면 불황 탓. 요즘 직장인들은 「불황」이라는 단어를 아침 출근하면서부터 퇴근할 때까지 수십번은 더 듣는다. 귀에 못이 박힐 정도. 「불황이니까 사무용 비품을 아껴써라」에서부터 「×××씨, 커피좀 작작 마셔. 불황인데…」에까지 모든 말에 약방의 감초처럼 따라 붙는다. 지긋지긋하다. 소위 「불황 스트레스」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것. 특히 명예퇴직 요주의 대상인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의 중간관리자일수록 더욱 그렇다. 『조간신문을 보는 순간부터 하루종일 「불황」이라는 단어에 시달린다. 직장상사들은 툭하면 뚜렷한 근거나 대책도 없이 「불황」을 들먹이며 기획안을 반려한다. 퇴근해선 TV 9시뉴스에서 또 「불황」이란 말을 듣는다. 어쩌다 한잔하고 집에 늦게 들어가는 날에는 아내에게 나도 모르게 「불황 때문에 한 잔 했다」고 핑계를 댄다』 대기업 과장인 박승헌씨(35)는 이렇게 말했다. 직장인들은 불황스트레스에 어떻게 반응할까. 개인의 성격과 처지에 따라 다양하다. ▼신토불이파〓그저 일을 만들지 않고 시키는대로 하는 게 제일이라고 생각한다. 땅에 엎드려 꼼짝도 안하는 복지부동(伏地不動)과 땅에 엎드려 눈만 움직이는 복지안동(伏地眼動)은 옛말. 요즘은 아예 몸을 땅에 딱 달라붙인 신토불이(身土不二)가 유행이다. 말도 극도로 절제한다. 「낮말은 부장이 듣고 밤말은 사장이 듣는다」는 게 신조. ▼앙앙불락파〓속에서 열불이 날 때마다 남이 안보는 곳에 가서 혼자 실컷 욕을 하거나 그게 안될 땐 마음 속으로 욕을 해준다. 때로는 퇴근 후 마음이 맞는 동료들과 술을 마시며 직장상사나 후배를 안주감으로 삼는다. 쌍용그룹 사보 「쌍용」이 최근 대리급 이상 기혼 남자직원 1백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마음 속으로 하루 10번 이상 욕한다」는 응답자는 43%, 「셀 수 없이 많다」는 13%였다. 욕하는 대상은 직장상사가 53%,동료가 30%. 욱하면 면전에서 욕하는 경우도 있다. ▼냉가슴파〓가슴에 쌓아놓는 형. 애연가들이 많고 가끔 긴 한숨을 내쉬거나 물끄러미 먼 하늘을 바라본다. 친하게 지내는 동료가 드물고 어쩌다 회식자리 같은데서 폭발하는 경우가 많다. 스트레스로 인한 위궤양 때문에 새벽에 잠을 못이루는 경우도 있다. 한국담배인삼공사에 따르면 하루 평균 담배판매량은 지난 1월 1천3백20만갑이었으나 4월에는 1천4백60만갑으로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런 현상은 불경기 때인 92년 이래 처음. ▼방황파〓직장일이 끝나도 왠지 집에 들어가기 싫다. 길거리를 방황하거나 친구들을 불러내어 밖에서 시간을 보낸다. 피곤할 땐 집에 가서 자는 것보다 영화관의 의자나 수면방의 캡슐에서 자야 편안하다. 중앙생명이 최근 서울의 기혼직장인 5백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중 4% 정도인 21명이 「일이 끝나도 그냥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대답했다. ▼실속파〓직장과 가정일을 철저히 구분해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두얼굴」의 사나이. 정시에 출근해 주어진 일만 하며 퇴근 후엔 쏜살같이 귀가. 술도 집에서 아내와 맥주 한두잔 마시는 것으로 끝낸다. 점심은 될 수 있으면 혼자 먹으며 여럿이 가더라도 더치페이를 기본으로 한다. 〈김화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