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인 둘째 아이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은 쪽지 하나를 꺼내 펼친다. 몹시 느린 동작으로 짐작되는 바 모의고사 성적표다. 과목별로 1백점만점의 선명한 점수와 석차만 확실하게 써 있던 우리 학교 다닐 때의 성적표와는 달리 항목이 많고 판독하기도 어려웠다. 길게 나열된 난수표 같은 성적표의 숫자들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과목별 점수백분율 반평균 전체평균 등을 비교하는데 아이가 기운 빠진 소리로 말한다. 『저기이…도장 찍구우…고 위에다가 뭐라구 써야 돼. 엄마가』 『감상문?』 『너무 짧으면 안된대. 두 줄은 돼야 된대』 아마 성적표를 부모에게 보여주지 않고 도장만 살짝 꺼내 찍어 오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직접 글을 쓰게 하는 모양이다. 「부족한 과목의 성적을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고 한숨과 손떨림을 참으며 두 줄로 나누어 쓴다. 「노력하겠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노력은 본인이 해야지. 참 텅텅 빈 내용의 글이다. 엄마가 작가라면서…. 「노력하겠습니다」의 「겠습니다」를 화이트로 지우고 「노력하도록 협조하겠습니다」로 고쳤다. 성적표를 건네받은 아이는 나와 시선도 맞추지 못하고 중죄인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다만 성적이 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이 아프지만 또 아무렇지도 않거나 잘했다고 깔깔거려도 문제겠지. 『너는 머리가 좋으니까 지금보다 더 노력만 하면 성적이 팍팍 오를 수 있어』 아이의 등을 두드리며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활짝 미소지었다. 입 가장자리 근육에 경련이 일어났지만. 재작년, 엄마가 야단치지 않고 오히려 격려하고 희망을 준데 용기를 얻어(아이가 나중에 한 말이지만) 고3 2학기에 모의고사 성적이 한번에 거의 10점씩 오르더니 결국 대학특차에 통과되었던 큰 아이의 경우를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공부가 잘 될 수 있는 좀 더 좋은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더니 자주 잠이 오는 게 문제라고 말한다. 「잠이 오면 세수를 해야지」. 그동안 하기 싫어서 신청하지 않았던 학교의 야간자율학습에 참가해보겠다고 아이가 스스로 말했다. 『맞아, 소프트파워시대야. 야단친다는 건 아무 효과가 없어』 나는 어렸을 때 성적이 떨어지면 엄마한테 몹시 꾸지람을 듣고 매를 맞았다. 그런데 야단맞으면서 다음부터 공부를 잘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모든 게 지겹고 확 죽어버리면 엄마가 얼마나 놀라고 후회할까 생각해본 적까지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이스커피를 만들어가지고 아이의 방에 들어갔다. 아이는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최연지 (방송극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