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지판 아라비안 나이트」 하일지 지음/민음사 펴냄 각 문명은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때로는 신화의 형태를 띠고 때로는 역사나 철학을 담지만 그들에게 공통된 것은 민족의 상상력에 바탕한 문학성이다. 이슬람 종주국을 중심으로 하는 사라센 문명의 대표적인 이야기는 단연 「아라비안 나이트」가 될 것이다. 그것도 상상력과 문학성의 비례관계를 인정한다면 가장 문학성 짙은 이야기가 된다. 비록 소략하고 조잡한 번역본이었지만 「아라비안 나이트」 혹은 「천일야화(千一夜話)」를 읽고 가슴 뛰어보지 않은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사라센 문명은 8세기 가까이나 서유럽 문명에 맞서 세계사를 반분했다. 그러나 근대 서유럽의 발흥은 세계사를 그들 중심으로 개편시켰고 거기 따라 오랜 적대세력이었던 사라센문명은 다분히 고의적인 비하를 당했다. 서유럽문명과 그 확대재생산인 아메리카문명을 모범삼아 근대화를 추진해온 우리에게도 그런 비하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런 점에서 「아라비안 나이트」도 크게 예외는 아니다. 여러 유럽어 판본이 있고, 근년까지도 할리우드영화가 즐겨 소재로 삼기는 했지만 그 풍부한 문학성이나 문화적 가치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갈수록 희미해지는 느낌이다. 하기야 사라센 문명의 이야기라고는 해도 「아라비안 나이트」에는 사라센제국의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중요한 뼈대는 배화교(拜火敎)를 국교로 삼았던 사산조(朝)페르시아에서 집성된 「천재의 이야기」이고 그밖에도 인도나 중국의 설화까지 뒤섞여 있다. 그러나 언어적으로는 아라비아어로,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이슬람교리로 통일됨으로써 철저하게 사라센화(化)된 문화적 보고다. 이러한 「아라비안 나이트」는 그대로거나 혹은 「천일야화」란 제목으로 이미 몇몇 판본이 나와있다. 하지만 일본어 중역(重譯)의 의심이 가는 조잡한 번역에다 내용을 멋대로 줄이거나 빼 그 참맛을 느끼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또 어떤 때는 「신밧드의 모험」이나 「알라딘의 램프」로 잘려나와 원작의 사상적 배경과는 무관한 공상모험소설로만 읽혔다. 그것도 우리 기억으로는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하일지씨가 번역해 엮은 「아라비안 나이트」(전3권)는 여러가지로 의의가 크다. 구미 일변도의 문화적 파고에 휩쓸려 퇴색해버린 사라센문화에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킨 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귀하게 여겨지는 것은 자칫 구닥다리 이야기로 전락해버릴 수도 있는 이 고전에 품위를 해치지 않고 현대상을 부여한 점이다. 저자 자신도 그 서문에서 말하였듯, 「아라비안 나이트」 원작은 워낙 분량이 방대한 데다 최소한 오백년전에 쓰여진 것이라 문체나 형식면에서도 현대 독자가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데가 있다. 저자는 그런 원작을 나름으로 재구성하여 사라센 문화의 한 정수를 훼손없이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완결까지는 더 두고 봐야겠지만 믿을만한 판본으로서 손색이 없을 듯하다. 이문열(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