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사람들은 무언가 불안해한다. 예술가들은 이 세기말을 어떻게 감지할까. 그들은 어떤 꿈과 희망을 품고 있는가. 예술을 통해 그들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대안은 무엇인가. 치열한 작업을 하고 있는 젊은 예술가들을 찾아 시대를 보는 눈, 미래에 대한 전망을 더듬어본다.》 하천을 가로지르는 맞바람에 시달려 빛이 바랜 낡은 벽과 삐걱이는 창틀. 잡초와 시큼한 개흙이 뒤섞인 대전천 바닥이 내려다보이는 대전 중구 선화동 낡은 작업실. 비디오 설치작가 육태진씨(36)는 깡마른 체구를 거리에서 주워온 재활용가구에 기대고 있었다. 지난 91년 토털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이래 비디오를 이용한 영상설치미술을 해온 육씨는 지난 5월 뉴욕에서 열린 「한국작가 10인전―호랑이 눈」에 뽑혀 「고스트 퍼니처(유령 가구)」등 3작품을 출품했다. 이 전시회를 계기로 9월 뉴욕 에이트플로어의 「빛을 내는 이미지」전에도 참가한다. 세계 각국 20명의 작가가 이미 예정돼 있었으나 주최측이 그의 작품을 보고 추가로 결정한 것이다. 그는 올해 광주비엔날레와 98년 일본 도쿄 Q갤러리에서 잇달아 전시요청을 받고 있다. 화단의 주목과는 달리 현실은 엄혹하다. 실업고를 거쳐 대전 목원대를 졸업한 그는 석공 페인트공 일일노동자로 닥치는대로 일해야 했다. 최근 생계수단이던 미술학원 강사자리도 잃었다. 전시회준비로 자리를 오래 비웠기 때문. 제작을 요청받은 작품들도 돈이 없어 손도 못댄다. 이러한 삶의 무게가 그의 모티브이며 작품으로 피어난다. 「고스트 퍼니처」는 오래된 고가구의 서랍속에 비디오를 설치, 등을 지고 끝없이 계단을 오르는 남자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서랍은 전기장치로 반복해서 여닫힌다. 걷는다는 것, 계속해서 살아내야하는 삶의 고단함…. 이는 현대인 모두의 자화상이다. 그래서 작가는 황지우의 시 「나는 너다」를 카탈로그에 끼워놓곤 한다. 이러한 이미지는 벽면에 끝없이 걷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보행자」에도 나타나 있다. 작품에 고가구를 사용한 것은 『먼 옛날 이야기를 하듯 돌려서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요절이 불러온 옛 것에 대한 그리움도 있다는 그는 주저주저 하면서 『한때 대인공포증이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때문일까. 그는 관조적이며 차분하게, 의미의 「숨김」을 통한 상징성을 얻고 있다. 현란한 첨단매체시대에 뚜렷이 대비되는 그의 이러한 특징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주목된다. 하지만 현실의 궁핍속에서 예술은 무엇인가. 그는 『작업활동을 못하면 더 괴로울 것』이라고 토로한다. 그에게 예술은 고통이자 구원이다. 〈이원홍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