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 지음/문학과지성사 펴냄] 『살―정열의 시발역이자 종착역. 사랑의 말들은 살들의 말이다』 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은 흐벅진 말의 성찬을 보여주는 일종의 사랑어사전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사전의 딱딱한 형식주의와 엄숙한 객관주의는 이 책과 무관하다. 언어학자의 과학적인 분석 대신 이 책은 때로는 비체계적이고 또 때로는 일탈적이기까지 한 한 몽상가의 우리말에 대한 도착적인 애증을 담고 있다. 「가시리」나 「만전춘 별사」, 황진이의 시조 등에 나타나는 우리말의 살가움과 은근스러움에 대한 예찬과 함께 「몸을 버리다, 몸을 더럽히다, 몸을 바치다, 몸을 빼앗다」 등의 표현에 어려있는 우리말의 봉건성에 대한 구역질나는 염증은 이 책의 도처에서 발견되는 양면적인 진술들이다. 「염증」이 그를 이 땅 밖에서의 삶으로 이끌었다면, 「예찬」은 아마도 떠나간 자의 낭만적인 그리움에서 발원한 것일 터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애증의 도착성은, 가히 한 집에 살 때는 그 아름다움을 알지 못했던 「사철 발벗은」 조강지처를 새삼스레 그리워하는 늙은 오입쟁이의 가슴앓이에 비길 만하다. 이 책의 지은이가 어느 날 불현듯 이 땅을 떠나 프랑스에 안착한, 이른바 「자발적 망명 지식인」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사실은 더욱 두드러진다. 나는 이 책의 갈피갈피에서 사랑하기 위하여, 그리워하기 위하여 자신의 근친을 떠난 사랑지상주의자의 역설적인 「관능」을 읽는다. 그의 사랑법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것, 「사랑하기에 떠난다」는 얄궂은 명제,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는 바로 옆에 있는 것,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것을 그리워하지 않는다는 유서깊은 오해가 깃들여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진정 사랑하고자 한 것들은 옆에 있을 때는 결코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이었을까? 과연 그럴까? 아마도 바로 옆에 있는 연인의 살냄새를, 참을 수 없는 이 땅의 비합리를 사랑의 향취와 혼돈 속의 생명력으로 탈바꿈시켜주는 것은 서울∼파리간의 그토록이나 먼 거리는 아닐 것이다. 그 역시 이렇게 밝혀 놓고 있지 않은가. 『사랑이 하나의 과정이라면 그것은 스스럼이 없어지는 과정이다』라고.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은 뒤늦게 이 깨달음에 이른 자의 외마디 비명일 수도 있겠다. 신수정(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