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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곳에선]홍은택/北대사 망명과 美의 고민

입력 | 1997-08-30 20:17:00


장승길 주이집트 북한대사의 망명사건이 터지면서 워싱턴은 곤혹스런 분위기에 싸여있다. 잘되어 나가던 북한과의 관계가 갑자기 정체되고 복잡성이 더해졌다는 느낌을 주고있다. 국제정치나 협상에서 게임의 룰을 무시해온 북한을 다시 대화의 장으로 돌려 세우는 일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경험해온 미국이기 때문이다. 국무부관계자들은 미국이 북한의 의도를 알면서 또 다시 얼마간 양보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껄끄러운 심정을 내비치고 있다. 핵무기개발을 막기 위해 원전을 제공하면서까지 그 약속을 받아내지 못했다. 식량을 지원받으면서도 4자회담테이블에 나오는데 온갖 조건을 붙이던 북한이었다. 장대사의 망명은 그런 북한을 간신히 끌어낸 시점이었다. ▼ 껄끄러워진 北―美 관계 ▼ 북한은 이번 사건이 발생하고 며칠이 지나도록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처음엔 장대사 일행이 한국에 가느냐고 고집스럽게 물었고 한국에 못가도록 보장해달라고 미국측에 요구했다는 후문이다. 이것이 북한과 미사일 회담을 앞둔 미국이 북한측의 의도를 낙관적으로 판단했던 이유중의 하나였다. 미국도 처음에는 장대사 일행을 한국에만 안보내면 北―美(북―미)관계는 큰 지장을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같다. 기존 4자회담을 위한 대화의 틀도 손상받지 않으면서 북한의 중동(中東)에 대한 미사일 수출과 북한 내부의 권력동향에 대한 정보도 덩굴째 굴러들어오는 일거양득을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미사일회담을 보이콧함으로써 상황은 급랭됐다. 더구나 미국 중앙정보국의 망명기획설까지 터져나오고 있는 마당이어서 미국은 대단히 언짢은 심정을 보이고 있다. 좀 복잡한 얘기지만 남북한과 미국과의 관계는 시소타기와 같다고들 한다. 남북관계가 좋아져 한반도의 긴장이 완화되면 미국의 군사력에 의존할 필요가 적어진다. 반면 남북관계가 악화되면 한국은 돌발적인 상황을 막기 위해 그만큼 미국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 미국도 마찬가지. 한 외교관은 미국이 가장 무서워하는 게 무엇인지 아느냐는 퀴즈를 냈다. 정답은 남북간의 직접 접촉이다. 동북아 안정의 축, 나아가 점증하고 있는 중국의 영향력을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견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보해야 할 한반도 문제의 논의에서 미국이 배제되는 것은 최악의 시나리오다. 이런 점에서 미국은 남북관계가 경색돼 있는 상황이 가장 행복한 고민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남북이 미국을 통해서만 대화를 주고받는 형국이어서 남북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 이때문에 종종 지난해 북한의 잠수함 침투사건과 같은 악재가 발생할 때마다 북―미관계는 오히려 진전되는 기현상을 보였다. 미국이 잠수함사건의 후속처리에서 죽어도 못하겠다는 북한의 등을 떼밀다시피해서 한국에 사과하라고 할 만큼의 관계가 됐었다. ▼ 협상 견인 지렛대없어 ▼ 워싱턴은 장대사 망명에 따른 북한의 주장과 요구가 관례에 어긋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정면으로 반박은 않고 있다. 북한이 강하게 반발하지만 궁극적으로 협상과 대화의 테이블에 나올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지금 미국으로서는 장대사 일행이 범죄자라고 해도 북―미간에는 범죄자인도협정이 없다면서 북한을 구슬리는 것외에 뾰족한 수단이 없다. 국무부는 당장에 북한을 협상장으로 견인할 지렛대가 없다는 점과 앞으로 얼마만큼의 시간과 공을 다시 들여야 할지를 가장 고민스러워하고 있다. 홍은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