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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박완서/「안으로 굽는 팔」의 민망함

입력 | 1997-08-31 20:06:00


게르(몽골의 천막집)에는 남매만 남아 있었다. 푸른 초원 위 외딴 게르였다. 누나가 한컵밖에 안되는 물을 앞에 놓고 때로 얼룩진 동생 얼굴에 비누칠을 하고 있었다. 그 작은 그릇의 물로 어떻게 세수를 하나 봤더니, 아이는 입에다 한모금씩 물을 물었다 손바닥에 뱉어내서 얼굴을 닦는 것이었다. 그런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세수를 하고 난 아이는 헌 자전거 바퀴지 싶은 은빛 굴렁쇠를 신나게 굴리면서 가없이 너른 초원 위를 유연하게 선회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 급증하는 몽골 고아들 ▼ 면적은 남한의 15배나 되는 광활한 땅에 인구는 겨우 2백50만명밖에 안되는지라 지방으로 갈수록 가도가도 끝이 없는 푸른 초원에는 풀 뜯는 양떼 소떼 말의 무리뿐, 마을을 보기 어렵다. 어쩌다 나타난 게르도 한두개씩 띄엄띄엄 흩어져 있어 마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여름의 햇빛은 원시처럼 순결하고, 하늘이 감청색으로 보일 정도로 공기는 투명하다. 소나기가 지난 후 홀연 지평선에 걸린 무지개는 선연한 쌍무지개다. 그 아득한 지평선상을 안장도 없는 말을 타고 바람처럼 질주하는 이는 누구인가. 낯선 길손을 보고 슬로비디오처럼 서서히 속도를 조절하는 소년의 나이는 겨우 일곱살밖에 안됐다고 한다. 그 나이면 컴퓨터게임을 즐기거나 다마곳치를 가지고 놀 우리나라 아이들이 과연 이 나라 아이들보다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 친선대사의 자격으로 어려운 나라 어린이들의 실상을 살펴보러 왔다는 사명감을 잠시 망각하고, 도리어 질투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저렸다. 그러나 오랫동안 구소련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데다 바다를 끼지 않았다는 특수성 때문에 외부세계와 단절돼 있던 이 거대한 유목국가에도 개방의 물결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개방정책은 근대적 산업화의 열망을 가져왔고, 그 과도기적인 현상으로 유목인구가 도시로 몰려들면서 수도 울란바토르 외곽은 광범위하게 도시빈민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국가적으로 인구증가정책을 쓰고 있어서 가뜩이나 인구에 비해 아이들 숫자가 많은데다, 이혼의 증가와 가장(家長)의 가출 등 가정의 붕괴로 인한 일시적인 기아(棄兒) 등으로 많은 고아원이 산재해 있었다. 고아원의 가장 큰 문제도 물문제였다. 중심가의 일부를 빼고는 수도시설이 없고, 지하수도 본디 귀한 건지 개발을 안한 건지, 여행을 왔다가 차마 발이안떨어져눌러앉았다는 백인여자가 돌보는 고아원은 비교적 깨끗한 편이었는데도 갓난아기가 많아 지린내가 몹시 났고 가끔 시키는 목욕은 개울을 찾아가서 시킨다고 했다. ▼ 더 어려운 北을 생각하며 ▼ 근래에 간염의 증가가 두드러진다는데 이런 비위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고아원 아닌 가정집의 위생상태는 더 나빴다. 의무교육이라고는 하나 신발이 없어 학교를 못가거나, 형의 발이 커지면 아우가 형의 신발을 물려 신고 학교에 가는 대신 형이 집에 남는 일도 흔했다. 해방후와 6.25후 우리 모두가 극빈(極貧)했을 때, 유니세프를 비롯한 외국의 원조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때 걸신들린 것처럼 얻어먹은 생각을 하면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한때는 우리도 외국의 원조 없이는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정도로 극빈했었다. 그런 참담한 기억 때문에, 어린이의 기아(饑餓)나 질병은 국경과 이념을 초월해서 돕고 보자는 유니세프 이념에 기꺼이 동참했다. 그런데도 몽골에 있는 동안 민망하게도 몽골보다 더 어려울지도 모르는 북한 어린이들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고, 유니세프를 통해 북한 어린이도 도울 수 있다는 게 그래도 한가닥 위로가 됐다. 박완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