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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지명관/「징비록」을 되새기며

입력 | 1997-09-07 20:17:00


요즘 사태를 바라보노라면 조용히 선인들이 남긴 글이라도 읽고 싶어진다. 임란 후 유성룡은 뼈아픈 심정으로 「징비록」을 집필하면서 왜란을 반성하고 앞날을 위해 경계하려고 했다. 서울에 적병이 가까이 왔을 때였다. 지켜야 할 성첩(城堞)은 3만여인데 그것을 지킬 사람은 겨우 7천명, 그것도 훈련이 없는 오합지중이었고 모두가 도망치려고만 했다. 하급 지휘관이나 관리들은 뇌물을 받고 이들을 놓아 주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군정(軍政)의 해이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 난국을 이겨낼 지도자 ▼ 한 군데만 더 인용해 보자. 적병이 대동강가에 나타나자 고관들이 평양성을 빠져 나가려고 했다. 백성들은 칼을 빼들고 길을 막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평일에 국록을 도둑질해먹고, 이제 와서는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을 기만하고 마느냐』(南晩星역 참조) 이처럼 「징비록」의 책장을 넘기는 것은 오늘이 임란 때와는 전혀 다르다고 해도 역시 난국에 처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징비록」은 그 시대에도 충신이 있었음을 보여주지만 그들은 거의가 비극적인 인물이었고 권력이라도 쥐고 있다면 대개가 자신이나 가족의 몸만 사리고 그런 난세에도 세도를 부리고 모함을 일삼았다는 것이다. 12월 대선에 도전하려는 분들은 모두가 자기만이 나라를 살릴 수 있는 묘방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나는 결코 나나 내 가족을 위해서 몸을 사린 적이 없고 앞으로 권력을 쥔다고 해서 법을 무시하고 세도를 부린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러나 그분들이 목청을 높이고 열을 올려도 국민은 왜 이다지도 냉담한지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어느 누가 새로이 「나로다」 하고 등장하면 조금 동요가 있는 듯하지만 곧 『당신도 마찬가지』라는 체념에 빠지는 것 같다. 이것은 불행한 정치상황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럴만한 사유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자기도취에 빠진 채 승리와 영광에 대한 환상에만 젖어 있다고 해야 한다. 설혹 그런 분이 승리를 차지한다고 해도 난국 극복이란 요원할 것이다. 「징비록」에 기록된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는 그간 너무나 많은 부정이 횡행했다. 국정이 여지없이 해이했음을 국민은 피부로 실감하고 있다. 임란 때처럼 「국록을 도둑질해먹고」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을 기만하고」라고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것을 참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독재의 폭력에 대한 항거는 없다. 지방자치도 시작됐고 앞으로는 내놓고 지역을 차별하고 어떤 지역에 특혜를 주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한이 맺힌 아우성도, 원색적인 지역감정의 흥분도 없는 것 같다. 다소 심한 용어를 쓴다면 격정과 광기의 시대는 지나간 모양이다. ▼ 이합집산으론 안된다 ▼ 이제 정치지도자에게 기대하는 것은 신뢰할 수 있는 자질과 국가적인 비전이 아닐까. 국민통합을 이룩해내고 과감하고도 신중하게 국제관계를 이끌어갈 수 있는, 그런 분이 시계에 들어오지 않는다. 뚜렷하게 자기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고 앞으로 이합집산 또 무슨 거래를 하겠다는 것일까. 미사려구는 넘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할 윤리적 의지를 국민은 의심하고 있다. 선출만 되면 하루 아침에 절대자로 변신하는 권력자들만 우리는 보아 왔다. 어쩐지 「징비록」의 시대가 아직 가시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들건만 그것은 나만의 시대착오의 환상일까. 지명관(한림대교수/사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