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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에세이/21세기 앞에서]「문화 인프라」키우자

입력 | 1997-09-29 20:43:00


외국생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문화생활에 관한 것이다. 작은 도시라도 전통깊은 교향악단이나 훌륭한 극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 부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내가 정작 부러워하는 것은 하드적인 인프라뿐만 아니라 문화에 대한 그들의 마음자세나 태도다. 한마디로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자산을 일상생활에서 잘 활용하고 있다. 외국의 도시에서는 이른 아침이면 유명한 유적지나 문화재 주변에서 산책이나 조깅을 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문화재가 생활의 일부가 됨으로써 정신적인 문화 인프라도 풍부해질 수 있다. ▼ 생활속에 뿌리내려야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문화재하면 「보호」라는 말부터 떠오르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경복궁이나 덕수궁에서 조깅을 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곳에는 예외없이 튼튼한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다. 선진국들의 문화가 「열린 문화」라면 우리는 「닫힌 문화」다. 우리는 일단 문화라고 하면 먹고 사는 일상생활과는 다른 「특별한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는 21세기에 필요한 문화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 보통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문화적인 소양이 자라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선진국들처럼 박물관 전시관 음악당 등 문화시설을 충분히 갖추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당장 이런 하드적 시설이 없이도 가능한 부분들이 있다. 지방자치단체 중심으로 문화의 지방화를 추진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관할 동(洞)이나 구(區)의 주민들 중에서 자원자를 뽑아 악단을 운영하거나 조그만 미술전시회를 가져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연주나 그림의 수준이 좀 떨어지더라도 상관이 없다. 고급문화만이 훌륭한 문화는 아니다. 사람들의 문화적 감수성은 타고 나는 것도 있지만 자라면서 듣고 보며 형성되는 것도 있다. 옆집 아저씨나 아줌마가 연주하는 동네 음악회를 보며 자란 아이와 어쩌다 부모 손에 이끌려 세계적인 교향악단의 공연을 보러 가는 아이 중에 누가 더 문화적 안목이 커질지는 자명하다. 특별한 사람들이 향유하는 고급문화만을 문화라고 생각하는 아이는 기껏해야 비뚤어진 엘리트문화 의식만 생길 뿐이다. 기업들도 이러한 문화활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기업의 문화활동이라면 문화행사에 돈이나 내는 정도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기업 스스로도 사회조직의 하나로서 문화활동을 할 수 있다. ▼ 21세기엔 중요한 자산 앞으로는 기업이 만드는 제품에도 그 기업의 문화와 이미지가 담겨야 한다. 문화적인 경쟁력은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단 문화적 자산이 만들어지면 그 효과는 신제품 몇 개 개발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크다. 기업들은 거창하게 「메세나 운동」같은 것만 찾을 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화적 인프라를 향상시키는데 한몫을 해야 한다. 기업자체가 사회의 일원이고 21세기는 문화경쟁의 시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희(삼성그룹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