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李滉·1501∼1570)이 살다간 16세기는 조선 지성사(知性史)에서 볼 때 사림(士林)의 성장기로 규정할 수 있다. 「사(士)」란 성리학을 전공, 그 이념을 자기화하여 실천하는 선비이며 사림이란 선비의 복수개념이다. 이들은 선비로서 수기(修己·자신의 인격과 학문을 닦음)하여 학자관료인 사대부(士大夫)가 되어 치인(治人·남을 다스림)하는 것을 정도로 삼았다. 이황이 여섯살 때인 1506년 일어난 중종반정으로 사림의 시대가 도래한 듯 싶었지만 아직 막강한 권력을 향유하고 있던 구 정치세력인 훈구파와 조광조(趙光祖) 등의 과격한 신진사림이 벌인 개혁이라는 한판 승부는 중종의 심판으로 사림이 지고 말았으니 1519년의 기묘사화가 그것이다. 조광조 등 사림파의 개혁실패는 그후 사림들의 행로에 여러가지 영향을 미쳤는데 이황의 일생 역시 그러한 시대상황과 무관할 수 없었다. 그의 일생은 태어나서 33세까지의 성장기, 34세부터 49세까지의 사환기(仕宦期·관직에 있던 시기), 50세부터 70세 사망할 때까지의 강학기(講學期·강의하며 학문에 침잠하던 시기)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그의 성장기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이는 어머니 밀양 박씨와 생후 7개월만에 아버지를 여읜 그에게 아버지와 스승의 역할을 감당해준 숙부 이우 였다.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비교적 순탄하던 그의 관직생활은 1543년 43세때 성균관 대사성직을 사퇴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벼슬을 거절하는 「사직(辭職)」의 연속이었다. 바로 이때부터 인종과 명종이 교체되면서 을사사화(1545)의 싹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난정(亂政)이 시작되었다. 윤원형의 집에서 나는 썩은 고기 냄새 때문에 사람들이 코를 들고 다닐 수 없었다 하니 뇌물로 관직을 사는 부패상을 단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그는 꼿꼿한 선비로서 이 어려운 시대의 처신을 사직으로 일관하였다. 벼슬살이는 사대부로서 당위이지만 그것을 뿌리치는 사직은 구정치세력이 극성하던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이었다. 명종대에 물러나기를 되풀이함으로써 오히려 명망을 얻은 이황은 50세부터 70세까지의 강학기에 탁월한 학문적 성취와 제자 양성이라는 두가지 업적을 이루어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사부(師傅·왕의 스승)로 대접받고 그의 제자들이 조정에 대거 등용됨으로써 사림정치의 기반을 다졌다. 그가 68세 되던 다음해에 선조에게 올린 「무진6조소(戊辰六條疏)」는 노학자가 어린 왕을 위하여 평생의 학문의 온축(蘊蓄)을 풀어내 「제왕의 길」을 여섯 항목으로 제시하고 있다. 같은해 선조에게 바친 「성학십도(聖學十圖)」는 자신이 몇십년에 걸쳐 공부한 성리학의 요체를 열가지로 도설화하여 조선학자로서 성리학체계를 독자적으로 재편성한 것이다. 성리학을 공부하는 최종 목표가 훌륭한 통치를 위한 것이므로 성학(聖學)이란 성리학적 제왕학을 일컬으며 궁극적으론 정치학을 말한다. 정치를 제대로 하기 위해 최고통치자인 제왕의 치열한 자기 연마와 인격적 완성에 이르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성리학적 철학의 기초는 우주론적인 이기론(理氣論)에 있다. 음양동정(陰陽動靜)하는 작용으로서의 기(氣)와 그 작용의 원리인 이(理)에 의하여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바로 이와 기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느냐 하는 문제가 당시인들의 철학적 논제였고 그것을 해석하는 입장에 따라 현실문제에 대한 관점과 대처방안도 차별성을 띠게 되었다. 이황은 이와 기가 같은 비중으로 상호작용한다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의 입장이었다. 그의 논의의 주안점은 이의 능동성을 인정하는데 있었다. 후에 그의 제자들이 주리론(主理論)을 들고 나와 구체적인 현실문제보다 원칙에 강한 이론가들이 된 근거가 여기에 있다. 사림의 선생으로 이황이 받은 국가적 예우와 그 제자들의 정계등장은 그들의 정치적 기초이자 이념적 지주로서 기능하던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심화와 그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그만큼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선배인 조광조가 학문적 성숙을 기하지 못하고 성급한 개혁을 추진하다 미숙성 때문에 실패했다는 철저한 반성 위에서, 그후 반세기에 걸친 이황을 비롯한 사림의 학문적 축적과 제자 양성 등 각고의 노력 끝에 학계뿐만 아니라 정계에서 사림이 대세화했던 것이다. 외래사상으로서의 성리학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이뤄내 통치이념의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을사사화 후 낙향하여 낙동강 상류의 토계(兎溪)를 퇴계라 고쳐 호로 사용하였다. 평생을 물러나겠다고 하며 살았던 그의 행적을 대변하고 있다. 그의 내면적이며 개인적인 성찰은 경(敬)을 실천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참된 선비가 되기 위하여 항상 삼가는 경건한 태도를 견지했던 것이다. 그는 16세기 조선왕조 전기의 체제가 이완되어 나타난 여러가지 문제점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양심세력인 사림을 양성하기 위해 자신은 물론 제자들을 의식화시킨 진정한 교육자였다. 정옥자 ▼ 약력 ▼ △서울대 사학과 졸업 △서울대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저서 「조선후기 문화운동사」 「조선후기 지성사」 「조선후기 역사의 이해」 「역사에세이」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