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우울」 최영미 지음/창작과비평사 펴냄 「아무도 날 쳐다보지 않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여자가 담배를 피운다고 수상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없었던 것이다」. 런던 히스로 공항에 도착한 저자의 첫 소감이다. 타인의 「시선」에 대한 이 유별난 강박과 해방감은 「시대의 우울」이 나에게 말을 걸어 온 직접적인 계기였다. 50만부도 넘게 팔렸다는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가져온 반향은 여러모로 엄청났지만, 시집의 대중적인 성공이 시인 최영미에게 반드시 행복한 경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제, 잔치는 끝났다」고 선언하며 80년대를 「박제화」한 장본인이라는 세간의 「오역」을 염두에 둘 때, 풍문과 시선에 대한 이 시인의 거의 무의식적인 공포감은 이해하지 못할 성질의 것도 아니다. 나는 「최영미의 유럽일기」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시대의 우울」을 통해 한 예민한 자의식이 세계와 벌이는 치열한 고투를 본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눈으로 진정한 자아를 찾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의 여정은 소설 주인공의 모험에 가득 찬 행로에 가깝다. 그러기에 런던∼파리∼쾰른∼밀라노∼니스∼빈∼베네치아 등 이방의 도시를 향한 순례 끝에 정작 그가 도달하게 되는 것은 「내가 어떤 인간인지,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게 무엇인지, 얼마짜리 방이면 만족할 수 있는 인생인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그리워하는지」에 대한 정직한 깨달음이다. 자신의 성격에 잘 맞을 것이라던 에스파냐와 한때 동경의 대상이었던 프라하에서 다만 무시무시한 광기와 참을 수 없는 합리만을 감지하는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맨얼굴은 독일의 편리한 문명과 파리 시민의 거칠 것 없는 자유, 니스의 화려한 햇빛과 베네치아의 개방성에 대한 매혹 속에 깃들여 있다. 근대주의자의 모험. 나는 이 시인의 여정에 이런 이름을 붙인다. 80년대에는 마르크스주의자와 화해하지 못하고 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과 손잡지 못하는 그의 당혹감은 바로 이 시대 30대의 「우울」한 초상이다. 나와 당신에게, 그리고 그에게 「잔치」는 아직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신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