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첫 과제물을 받았을 때입니다. 「A4용지 3∼4장 분량으로 워드로 쳐서 낼 것」. 교수님 말씀에 전 당황했습니다. 중학교 기술시간에 배운 크기별 종이명칭이 어렴풋이 떠올랐지만 A4가 칠판에 걸어놓는 궤도 크기인지, 스케치북 크기인지 요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문구점 아저씨에게 물어보면 알겠지」. 그런데 워드는 뭘까. 「나는 학교에 갑니다」처럼 문장을 쓰지 말고 단어(워드·word)만 가지고 과제물 전체를 「나 학교 감」같이 쓰란 말일까. 자존심은 일단 접고 썰물처럼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친구들 중 아무나 붙잡고 다급하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 워드가 뭐냐?』 썰물은 고요한 호수로 바뀌었고 호수 한 가운데서 조금씩 부글거리기 시작한 킥킥거리는 소리는 곧 끓어넘치는 폭소로 변했습니다. 제가 「언플러그드(코드 뽑힌·unplugged)경석」이란 별명을 얻은 것도 그 때입니다. 쪽팔리기는 했지만 워드의 중요성을 알고나서는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죠. 7∼8년 전만 해도 워드를 쓰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보석글」 「팔란티어」같은 전문가용 워드프로세서가 있는 정도였고 지금은 없어진 전동타자기를 팔던 시대였죠. 보통사람도 컴퓨터를 이용해 인쇄물같은 멋진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8년전인 89년 4월의 일입니다. 지금 「한글과 컴퓨터」의 이찬진사장을 비롯한 당시 서울대생 4명이 만든 「아래아한글」이라는 워드프로세서가 우리나라의 글쓰기 문화를 통째로 바꿔 놓은 것입니다. 공짜로 복사해 쓸 수 있었던 「아래아한글」은 모든 기능에서 돈주고 사는 다른 프로그램을 능가했죠. 사용법이 쉬워 컴맹도 반나절만 익히면 기본적인 기능은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사장은 내친김에 「한글과 컴퓨터」라는 소프트웨어 회사를 차렸고 아래아한글도 1.0에서 시작해 아래아한글1.2, 아래아한글2.0 아래아한글2.1 아래아한글 2.5 아래아한글3.0,3.0b 아래아한글96까지 발전해 지난 달에는 아래아한글97까지 선보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아래아한글」을 쓰지 않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됐고 대학이나 회사 같은데서는 서로 문서를 주고 받는 「표준」이 됐죠. 현재 아래아한글을 쓰는 사람이 7백만명이 넘는다고 하니까 정말 장난 아니죠. 저도 친구가 아래아한글로 쓴 과제물을 받아 제 컴퓨터로 슬쩍 바꿔 낸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에요.:) 이제부터는 최근 나온 아래아한글97을 가지고 「악필들도 예쁘게 글 쓰는 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품 이름 뒤에 붙는 1.0, 1.5, 3.0등의 숫자〓그 제품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숫자입니다. 「버전」이라고도 하죠. 프로그램이 탄생하면 개발한 사람은 그 프로그램에 임의로 숫자를 붙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같은 프로그램의 개량판이 나올 때마다 제품이 발전된 정도를 가늠해 숫자를 조금씩 올립니다. 1.0에서 1.2로 바뀌었을 때보다 2.5에서 3.0으로 바뀌었을 때 프로그램이 훨씬 많이 달라졌다고 보면 됩니다. 서경석(MBC 코미디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