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학시절이었다. 필기 및 주행시험에 합격한 뒤 운전면허증을 교부받는데 또 다른 서류를 주면서 『이 서류에 서명하는 것은 당신의 자유』라고 했다. 「당신이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면 신체 일부 또는 전부를 기증하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서명한 뒤 『서명률이 몇 %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거의 다 한다』고 했다. 그해 어느날 농구경기를 응원하던 응원단장이 동료들의 헹가래를 받던중 머리가 먼저 바닥에 떨어져 뇌사상태에 빠졌고 그녀의 장기는 부모의 뜻에 따라 기증됐다. 심장은 비행기로 급히 이송되기도 했다. 그뒤 그녀의 부모와 장기를 이식받아 환하게 웃는 젊은이들의 사진을 보았다. 그녀의 부모는 『사랑하는 딸은 갔지만 빛나는 눈동자를 볼 수 있고 심장은 지금도 젊은이의 가슴속에서 뛰고 있기에 내 딸은 살아 있다』고 말했다. 잊을 수 없는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속에서도 의사의 뇌사판정을 의심없이 믿고 기증을 기다리는 이웃을 생각하는 박애정신은 어디에서 부터 나오는가.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언제 우리나라도 장기이식에 관한 국민의식이 이처럼 보편화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생명의 귀함을 누구나 잘 알면서도 실제로 신체 일부분을 이식받아야 하는 딱한 사정의 환자에게 새 생명을 되찾아주는 경우가 우리나라에서는 극히 드문게 현실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뇌사상태거나 교통사고로 숨진 사람의 신체를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하는 국민의 가치인식이 하루빨리 정착돼야 한다고 본다. 유교적 사상이 지배적인 동양적 현실을 감안할 때 사회적 합의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겠으나 과거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편협된 의식과 가치관을 개선하는데 동참해야 한다고 믿는다. 장기이식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뇌사의 정의와 판단기준을 마련, 의사가 뇌사를 인정하고 장기를 이식하는 의료행위에 대한 제도적 장치가 조속히 마련돼야 한다. 늦게나마 보건복지부가 「장기기증 이식에 관한 법」 제정을 추진중에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하루 빨리 시행되길 바라며 이에 앞서 충분한 홍보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면 한다. 그래야만 장기기증이 보편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기회에 운전면허증을 교부할 때 장기제공 희망자는 우대하는 방법도 제안하고 싶다. 장기제공을 애타게 기다리는 환자가 지금도 죽어가는 이 순간을 우리 모두 잠시 생각해보자. 한병희(충남대 교수·화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