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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쓰는 선비론/김인후]道와 義로 일관한「士林의 별」

입력 | 1997-10-13 08:04:00


유교는 인간의 모든 이상을 인간 자신의 힘으로 현세 속에서 실현시키려는 인본적 현세간(現世間)주의다. 따라서 유교는 피안과 초월을 지향하는 종교들과 크게 다르다. 유교의 이상은 단순한 인간의 욕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이 천(天)으로부터 품부받은 덕성을 잘 갈고 닦아 대인군자가 되어 천지만물과 함께 어우러져 도덕왕국을 건설하는 것이므로 그 목표는 어느 종교보다도 높고 그 목표에 이르는 길 또한 어떤 언행보다도 무겁고 먼 것이었다. 도불(道佛)은 현세간을 쉽게 부정하고 자기 세계나 경지로 홀가분하게 나아가는 길이 있지만 유교는 끝까지 현세간을 버리지 못하고 바로 그 현세간을 이상 세계로 교화해야 하므로 숙명적으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게 마련이다. 유교의 정치사가 의외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 격돌로 점철되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조는 유교로 세운 나라였다. 그러나 건국 과정부터 이상과 현실이 격돌하고 부모 형제가 의리와 인륜을 저버린 채 왕권을 놓고 상잔(相殘)하는 반유교적 작태를 드러냈다. 이는 조선조가 끝날 때까지 되풀이되었으며 늘 이상과 원칙이 현실과 변칙 앞에 참담히 무너지는 비극이 연출되었다. 이렇게 이상과 현실이 갈등 격돌하는 정치현장에서 자기 소신을 펼치려다 희생된 인물로 정도전(鄭道傳)과 조광조(趙光祖)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의 성패에 대한 평가는 자못 대조적이다. 정도전은 분명 조선조를 통틀어 가장 성공한 정치가다. 그는 한 나라를 설계 건설하여 이념에서 제도와 경영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각과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소신을 한껏 펼쳤다. 하지만 그는 5백년 동안 폄훼된 채 묻혀 지내야 했다. 반대로 조광조는 유교본위정치인 지치주의(至治主義)를 내세워 「군왕을 요순(堯舜)으로 만들고 백성을 당우삼대(唐虞三代)에 살게 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비명으로 끝났다. 그러나 그는 50년만에 복권되어 문묘에 배향되고 도학의 표상으로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현실과 변칙에 영합한 정치인은 성공해도 높이 평가받지 못하고 이상과 원칙을 고집한 정치가는 비록 실패했어도 추앙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현실이 어지러울 때 지혜를 주고 앞날이 암담할 때 바른 길로 인도하는 등대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조광조를 그토록 추앙하던 사림은 지치주의를 계승하기보다는 그를 화근으로 보고 논변을 일삼아 점차 활력을 잃어갔다. 세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이상정치에 대한 신심(信心)을 잃고 좌절과 허탈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광조의 지치주의가 점점 빛을 잃어갈 때 한가닥 희망을 걸고 도학과 지치주의 노선을 내걸고 나선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1510∼1560)다. 김인후가 당시 선비들이 화근시하는 조광조의 지치주의 노선을 다시 밟은 까닭은 무엇일까. 물론 그의 성정(性情)이 강개하고 학덕이 돈후한 데에도 기인하겠지만 그보다는 학맥과의 깊은 관계 때문이다. 그는 김안국(金安國)의 제자다. 김안국은 조광조와 함께 김굉필(金宏弼)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김굉필은 바로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순의 조선 성리학 도통(道統)을 이어받은 인물이므로 김인후는 도통의 직계이다. 그리고 스승의 형제나 다름없는 조광조와는 사숙질(師叔姪)이 된다. 때문에 하서는 정면으로 뛰어들어 그 어려운 유업을 짊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조광조를 죽인 중종에게 기묘사화의 잘못됨을 말하고 희생자들의 신원(伸寃)을 주청한 것은 이러한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으로,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사림의 입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가 세자때 가르치고 인도하던 인종이 등극하자 무엇보다도 먼저 신원되었으니 인종과 하서간의 묵계를 알만하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인종이 10년만 더 살았더라도 조광조의 지치주의는 다시 꽃을 피울수있었을것으로짐작된다. 우리는 그 가능성을 김인후 학문과의 만남에서 찾을 수 있다. 학문적으로 하서는 이기(理氣)를 포괄한 대심(大心)철학자다. 배타보다는 포괄, 분석보다는 회통을 중시했고 모든 사물을 같은 생명차원에서 교감했다. 그의 학설을 요약하면 이렇다. 「심(心)은 일신만사(一身萬事)의 주재자다. 그러나 심만으로 주재가 되는 것은 아니고 심에 내재한 이(理)를 타야만 주재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심을 정위(正位)시켜야 하는데 이 공부가 구방심(救方心), 입대본(立大本)의 경(敬)이요, 밝혀진 대심(大心·至理)을 다시 밖으로 확충해나가는 과정과 추진력이 수도요 지성(至誠)이다. 이 지성으로 진기성(盡己性)―인성(人性)―물성(物性)해서 천지의 화육을 돕고 천지와 상삼(相參)함으로써 우주생명의 대역사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천지는 부모요 인간은 형제며 만물은 동포다. 어찌 이물(異物)로 대할 수 있겠는가. 오직 순수감정으로 교류하고 사랑할 뿐이다. 천지를 슬퍼하고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아갔을 때 정반(正反) 시비(是非) 득실(得失) 호오(好惡)가 가려질 것이니 여기서 정치가 시작된다」. 하서가 단순한 성리학자가 아니라 차원이 다른 도학자임을 알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그의 학문과 사상은 과정을 중시하는 김안국의 온건한 학풍을 이어받은 것으로 조광조의 과격과 급진 그리고 고집과 배타 등의 약점을 보완하기에 넉넉하다. 유가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육도 중요하지만 국가 경영의 중심무대인 정치에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고 특히 군왕과 의합(意合)해야 한다. 김인후는 이러한 조건을 다 갖춘 행운아였다. 성균관에서 퇴계(退溪)를 비롯한 많은 현능(賢能)들을 만났고 특히 스승의 배려로 세자 보덕(輔德·세자를 가르치던 벼슬)이 되어 다음 정권을 잡을 세자와 군신관계를 떠나서 인간적으로 서로 경애하고 의기 투합했다. 이는 김인후가 장차 정치이상을 펼치는데 더없이 좋은 기회요, 절대적인 보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만복(滿腹)의 열정과 경륜, 신심과 희망은 인종이 1년도 못되어 승하함으로써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을 무엇으로 감당하랴. 그후 그는 일찍이 모실 이를 잃어버린 청상(靑孀)으로 자처하며 일체의 벼슬을 거부하고 절개를 지켰다. 그래서 그에게는 도의(道義)와 문장(文章)에다 절의(節義)가 더해진다. 그는 시와 술로 외로움과 허전함을 달래다 병들어 50세를 일기로 통한의 생을 마쳤다. 다음은 그가 인종을 애원(哀怨)한 나머지 단장의 피를 토하면서 쓴 사모곡이다. 「임의 나이 삼십을 바라볼 때에/내 나이 서른하고 여섯이었소/신혼의 단꿈이 깨기도 전에/시위 떠난 화살처럼 떠나간 임아/내 마음 돌이라서 구르질 않네/세상사 흐르는 물 잊혀지련만/젊은 시절 해로할 임 여의고 나니/눈 어둡고 머리 희고 이가 빠졌소/슬픔 속의 봄 가을 몇번이던가/아직도 죽지 못해 살아있다오/백주는 옛대로 물가에 있고/고사리는 해마다 돋아납니다/오히려 부럽구려 주나라 왕비/생이별이야 만난다는 희망이나 있으니」. 김충렬 약력 △대만대 철학과 졸업 △대만 국가박사학위 △경북대 계명대 대만대 고려대교수 고려대대학원장 역임 △저서 「천인화해론(天人和諧論)」 「중국철학사Ⅰ」 「노장철학강의」 「고려유학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