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은 길, 그길을 혼자 걷는 다는 것.시구는 사뭇 낭만적이지만 걸어본 사람은 안다. 그 걸음이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운지를. 늦도록 연구실 불을 밝힌채 자신과 싸우는 이들, 새로운 예술 지평에의 도전으로 기꺼이 진통을 감내하는 사람들. 거들떠 보지 않는 외길을 고집하는 외톨박이들을 찾아 우리 문화의 깊이와 역량을 가늠해본다.》 『역사학자나 지리학자가 아닌 사회학자가 왜 독도문제에 관심을 갖느냐고 물어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독도와 관련한 논의는 한일양국의 민족문제이며 이에 대한 연구는 사회학의 고유영역입니다』 서울대 사회학과의 신용하(愼鏞廈·60)교수. 20여년간 독도를 연구해오며 일본의 독도영유권주장이 거세지기 시작한 지난해 독도학회와 독도보존협회를 창설, 초대회장으로 활동중이다. 그는학문의 길로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독도문제를 저린 가슴으로 느끼고 있었다. 독도영유권을 둘러싼 한일양국간의 다툼은 신교수가 소년시절이던 1952년부터 시작돼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것. 어린시절 한국전쟁의 고초를 직접 겪은 신교수는 「우리 민족은 왜 분단돼 동족상잔의 비극을 맞았는가」라는 화두를 가슴 깊이 품고 있었다. 1957년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것도 이를 규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대학입학 후 남북분단의 원인을 일제의 식민통치에 두고 19세기 한국근현대사에서의 민족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해왔다. 독도문제는 이러한 연구 과정에서 핵심적인 부분중 하나. 『일본의 독도영유권주장은 한국의 주권에 대한 심각한 침탈이자 도전행위입니다. 독도는 단지 하나의 섬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주권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신교수는 대학원시절부터 독도와 관련한 국내외 자료수집에 착수했다. 『초기에는 큰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경험과 축적이 쌓였습니다. 규장각 등에서의 국내자료 수집뿐만 아니라 일본학자와의 자료교환도 활발히 했습니다. 국내자료만으로 우리의 주장을 펼 경우 제삼국에 대한 설득력이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를 추적하던 그는 1975년 독도에 얽힌 진실을 푸는 실마리를 잡게 됐다. 『일제가 1904년말에서 1905년초 러시아 군함을 감시할 초소와 망루설치를 위해 대한제국과 울릉도에 망루설치를 논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혹시 일제가 대한제국의 저항으로 이에 실패한 뒤 독도를 탈취한 게 아닌가하는 의문을 갖게 됐습니다』 신교수는 추적끝에 일본방위청의 극비문서인 러일전쟁당시 일본군함 운항일지 등을 수집했다. 이는 일본이 러일전쟁 수행을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독도를 강점했고 그래서 독도가 한국땅임을 자인하는 내용. 이러한 사실은 89년 「조선왕조의 독도영유와 일본제국주의의 독도침략」이라는 논문으로 발표됐다. 이 논문은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의 허구성을 통렬히 폭로, 한일양국간의 독도논쟁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이를 계기로 신교수에 대한 일본 우익세력의 경계가 시작됐다. 『일본의 교도통신 아사히신문에 이 논문이 크게 보도된 뒤 한번은 일본 대사관측에서 연구실로 찾아와 자료입수 경위를 추궁했습니다. 두명의 60대 일본인으로부터 「허위자료를 이용했다」는 억지주장이 담긴 편지도 받았습니다. 자료를 교환해오던 일본 학자 등과의 관계도 끊어졌습니다』 최근 일본측이 독도 주변 12마일이외의 주변 바다를 모두 공해로 정하자고 제안해온 것과 관련, 신교수는 『이는 장차 그들의 해군력이 한국을 압도할 때 국제적 역학관계를 이용해 독도를 장악하려는 의도』라고 분석했다. 『지난달의 미일간 상호방위조약 가이드라인에는 동해의 해양경찰권을 일본이 미국과 공유하도록 돼있었습니다. 이후 확정안에서 중국의 반발로 특정 해역에 대한 표기는 삭제됐지만 사실상 동지나해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허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신교수는 이러한 국제정세의 흐름을 반전시키기 위해 대외홍보강화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지난달 「독도, 보배로운 한국영토」 일본어 번역판을 낸 데이어 후속으로 영어로 번역판을 만들어 올해말 전세계 관련 단체에 배포할 계획. 한편 신교수는 후학양성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한국사회사 분야는 자료가 희귀해 발굴조사활동에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대형프로젝트를 통해 제자들과 공동연구를 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지만 지원이 없어 학생과 젊은 학자들이 참여를 꺼리는 형편입니다. 기금이 생기면 장학금을 조성해 후학양성에 힘쓸 계획입니다』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적부터 학자가 되려는 꿈을 키웠다. 국민에게 혜택을 주고 국가정책에 반영되는 실용적인 학문을 하고 싶었다는 것. 가장 존경하는 학자도 실학자 다산 정약용선생. 65년부터 교수생활을 시작하면서 현재까지 낸 논문만 2백16편. 여기에 다시 27권의 저서가 있다. 이는 연간 여섯편, 두달에 한편 이상의 논문을 냈다는 의미. 신교수는 5년여 남은 재직기간에 30여권의 저작집을 완간할 계획이다. 또 자료를 전산화하기 위해 뒤늦게 컴퓨터도 배우고 있다고. 이러한 왕성한 연구업적은 그의 지칠줄 모르는 향학열에 기인한다. 설날 추석 등 명절을 제외하고는 일요일 등 휴일에도 그의 연구실이 잠겨있는 일은 드물다. 『어려운 일에 부닥칠 때마다 「이것은 독립투사들이 겪었던 고난의 백분의 일도 안돼」하고 마음을 다잡곤 했습니다』 희끗희끗 센 머리카락과 부리부리한 눈매, 굳게 다문 입에서 지난 30여년간 자신을 채찍질하며 외길을 고집해온 연구자로서의 뚝심이 느껴졌다. 〈한정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