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쌀쌀해진 것 같아 옷장위에 올려놓은 겨울옷 박스를 내렸다. 요즘 입을 만한 스웨터를 찾고 있는데 뜻밖에 두꺼운 옷틈에서 얌전히 숨어 있는 수영복을 발견했다. 『아니 이게 왜 여기 있지. 지난 여름 휴가가기 전에 온 집안을 뒤져도 나타나지 않더니』 곰곰 생각해봐도 도무지 황당하기만 하다. 심상치않은(?) 조짐은 얼마전부터 이어졌다. 아이의 소풍도시락을 싼다며 어디엔 계란은 안넣고 단무지만 두세줄 넣어 뒤죽박죽 김밥을 만들질 않나, 분주하게 출근준비를 마치고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는데 뭔가 기분이 찜찜해 거울을 보니 앞머리에 헤어롤이 그대로 말려있질 않나. 친구들은 『주부건망증이지 뭐』라고 대수롭지않게 말해도 왠지 그냥 웃어넘길 수가 없다. 학교다닐 때부터 텔레비전을 보면 「저 가수 지난번에 무슨 프로에서 저 옷을 입고 나왔었다」고 집어낼 정도로 기억력과 눈썰미는 자신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선지, 누가 사소한 약속을 잊어버린다든지, 자질구레한 실수라도 거듭하면 속으로 무시하고 인색하게 대했던 것같다. 그런데 막상 내가 그런 처지가 되고보니 새삼스레 부끄러움을 배운 것이리라. 정말 그렇다. 어떤 일이든 상대와 입장을 바꿔 그 마음을 헤아려보면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 같다. 내가 아이를 낳아보니 배를 불룩 내밀고 다니는 임신부가 그렇게 예쁘게 보일 수가 없고 직장다니며 애 키우는 엄마들은 너무나 크게만 보였다. 근속휴가를 받아 일주일동안 전업주부노릇을 해보니 주부란 결코 만만히 볼 일이 아니었다. 호박부침개를 해준다며 호박떡을 만들어놓고, 옷을 다려준다며 오히려 없던 주름까지 만드는 날보고 아이는 『언제 회사에 출근할 거냐』고 물어왔다. 처음으로 아버지를 다시 보게 된 것도 직장생활을 시작한 다음이었다. 왜 저렇게 집에서는 말을 안하실까. 왜 술을 그리 많이 드실까. 철모르던 시절, 멀찌감치 지켜보던 아버지는 참 이해하기 힘든 분이셨다. 그러나 수습시절 얼굴이 벌개지도록 심하게 질책받고 있던 나이든 선배를 바라보면서 오늘 저녁 그가 굳은 얼굴로 집에 돌아가면 누구에게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 문득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미석(생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