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대교. 수많은 한강다리 가운데 애환이 가장 많이 담긴 다리가 한강대교다. 일제시대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 다리를 건너 만주나 남양군도로 끌려갔으며 6.25때 피란민 4천여명이 건너던 중 폭파돼 8백여명에 이르는 무고한 시민이 희생되기도 했다. 또 5.16 군사쿠데타 때는 「혁명군」과 「혁명저지군」이 처음 조우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동작구 본동과 용산구 한강로를 잇는 한강대교의 이름은 여러차례 바뀌었다. 사람과 우마차를 위해 놓았다고 「인도교」로 불리다 「제2한강교」인 양화대교가 생기면서 「제1한강교」로 불리기도 했다. 또 한달평균 2건이상 아치로 올라가 자살소동을 벌이는 사람들 때문에 「자살교」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이 때문에 서울시와 관할 용산경찰서는 95년9월 24개 아치의 양쪽 오르막부분에 폭 1m 길이 3m의 기름막을 5㎜두께로 발라 이후 자살소동은 사라졌다. 한강대교가 처음 건설된 것은 일제시대인 1916∼17년. 당시 일제는 공사비 84만3천원을 들여 수심이 깊은 노량진∼노들섬(중지도)구간은 아치교로, 노들섬∼용산구간은 가교로 한강대교를 세웠다. 이 대교는 1900년 하류쪽에 놓인 한강철교 공사에 쓰고남은 자재를 이용해 건설된 탓에 25년 을축대홍수 때 떠내려가고 36년 가교 부분을 4차로로 다시 놓았다. 이후 중앙에 복선의 전차궤도가 놓이고 좌우 양측에 각각 차도와 인도가 설치됐다. 한강대교는 우리 기술진에 의해 양화대교가 건설된 65년까지 서울동부지역의 광진교와 더불어 명실상부한 서울의 관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후 영등포구 구로구 동작구 관악구 등 강남지역의 도시확장과 인구증가로 1979∼81년 기존 제1한강교와 똑같은 다리를 건설해 쌍둥이 다리로 태어났다. 〈이헌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