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 끝에 몇 명의 천사가 춤출 수 있는가」. 이성(理性)이 신성(神聖)의 그늘에 묻혀있던 중세 말기, 스콜라 철학자들이 벌였던 논쟁의 하나다. 인간의 삶과 동떨어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문제로 목숨을 걸고 다투었던 것이다. 이성의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오늘날 철저히 분화된 학문 영역을 지키며 사는 학자들 세계에서도 때로 중세 스콜라 철학자의 모습을 목격하는 것은 역설적이다. 마치 모래 밭에 깊은 웅덩이를 파내려가다 버팀 기둥이 없어 그냥 허물어져 묻혀버리는 심정으로 오늘의 학자들은 좌절한다. 연구가 가치와 목표를 상실한 채 관행처럼 진행되고, 박사란 결국 비좁은 안목의 협사(狹士)로 전락하는 현실에 절망하기도 한다. 이러한 좌절과 실망은 「학제간(學際間)연구」란 이름의 「학문 융합」을 촉진하는 배경이 된다. 인류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불확실성의 시대.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는 본질에 다가설 수조차 없는 난제들이 쌓이고 있다. 이러한 카오스의 무게는 세기말 인류를 한없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나아가 「틈새」가 주체보다 더 중요해지기도 하고 종전의 학문 구획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학문 영역에서도 융합과 응용이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대학에서 유사학과를 통합해 학부제(學部制)를 운영하는 사례가 늘고 있으며 이제껏 담을 쌓기에 열중해온 여러 갈래 학문 영역은 「합동강좌」나 「협동과정」, 혹은 「지역학」이란 교통로를 만들고 있다. 그리하여 생물학과 사회학, 언어학과 전기공학이 만나고 무용학과 심리학이 접점을 찾고 있다. 산업화 과정에서 분화를 거듭해오며 쌓아올려진 「학과」란 견고한 성채가 스스로 벽을 허물고, 보다 폭넓게 담고 해석할 수 있는, 보다 열린 세계를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17일 오후 서울대 한 강의실에서는 「현대사회의 이해―현대사회와 인권」이란 강좌가 열렸다. 「페미니즘에서 본 섹슈얼리티와 사회정의」 「정신대피해와 인권회복운동」이란 주제강연에 이어 학생과의 토론으로 진행됐다. 이 강좌는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사회학 인류학 사회복지학 종교학 철학은 물론 법학 의학 교육학 전기공학 미생물학 등 다양한 전공의 강사진이 진행하는 합동강좌형식. 수강생 3백50명의 전공은 87개 학과로 사실상 대학의 전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95년 강좌를 개설한 한상진교수(사회학과)는 『새로운 학문추세는 각 분야간 상호협력을 촉진하는 방향』이라면서 『관련전문가들이 공동협력하여 학생들에게 폭넓은 교양을 얻을 기회를 주기 위해 강좌를 기획했다』고 말한다.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1학기를 마친 수강생 중 90.7%가 「교양과 사고방식에 발전이 있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일주일 3시간 강의를 위해 매주 7시간 이상 도서관에서 씨름한 학생이 13%나 되었고 15시간 이상 공을 들인 경우도 있었다. 광운대 주동황교수(신문방송학과)는 『통합강좌는 학생에게 학과수준을 넘어서는 넓은 사고의 지평을 제공해준다는 점이 강점』이라고 평가한다. 3년전 전자과 전기과 제어계측과 등 3개 유사학과를 통합해 학부제를 운영하고 있는 서울대 전기공학부의 성굉모교수도 『한집안 사촌끼리 쌓아놓았던 담을 허문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일부 대학의 「협동과정」도 학문융합을 위한 새로운 시도이다. 서울대 뉴미디어통신공동연구소에는 문과출신 언어학 박사가 이과의 음향학 분야와 협동해 음성신호처리에 관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있다. 현재 석사이상으로 제한적이긴 하나 앞으로 학문융합을 활성화시킬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학내 차원을 넘어서 여러 대학, 다양한 전공자들이 공동연구를 하는 「지역학」도 학문융합의 시도 가운데 하나다. 18일 명지대에서 동아시아 중동학회 연합회 주최로 열린 국제학술대회가 대표적인 예. 중동학회는 정치 경제 문화 역사 종교 어학 문학 토목공학 분야 전문가들이 참여해 중동지역을 집중탐구하는 것이 목표. 회장인 명지대 심의섭교수(경제학과)는 『다른 학문분야의 연구성과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지만 연구를 하는데 이런 기회에 얻는 「귀동냥」이 중요한 힌트가 되는 경우가 많다』며 학문간의 교류를 강조했다. 학문융합의 움직임은 미국 일본 등지의 추세를 반영하는 것으로 「붕어빵 찍어내듯」 졸업생을 배출하는 기관으로 굳어져가는 국내 대학의 위상에 대한 자성이기도 하다. 일본 도쿄대 사회정보연구소의 경우 과거 신문연구소란 이름아래 저널리즘 전공자가 중심이었으나 현재는 법학 경제학 문화인류학 사회학 전공자가 모여 정보사회에 관한 전반적인 공동 연구와 학부 상급학년 및 대학원생에 대한 강의를 한다. 사회전체를 조망하는 총체적 시야로 학내 사회과학연구소와 치열한 학문적인 경쟁을 벌이면서 지적 자극을 주고 받고 있다.학문융합의 배경에는 물론 산업적이고 기능적인 수요도 있다. 정보사회가 대두하면서 본격화된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나 벤처기업의 등장이 그것이다. 기술전문가이면서 동시에 경영에 대한 마인드를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현재까지는 연구비와 과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관련자를 모아서 공동 프로젝트 팀을 구성해 해결하는 방식이었지만 항상 그 결과에 대해 연구자 스스로가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 학문융합을 위한 국내의 시도들은 「동강난 학문 세계」를 지양(止揚)하려는 의미가 크다. 아직도 엄밀한 의미의 학문융합과는 거리가 있다. 거기에 한국사회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 엔진이어야 할 대학의 고민이 있다. 〈조헌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