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광장).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옳게 보았다. 아버지는 난장이였다」(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돌아서며, 나는, 아득히, 내던져진다. 아득히 내던져져서, 나는, 천천히, 너에게로, 다가선다. 벽에 등을 대고, 너는, 다가서는 나를, 텅 빈 눈으로, 올려다본다…」(낯선 시간 속으로). 그게 언제였던가. 소설이 타락한 세상의 낯선 시간을 가로질러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에 이르고자 했던 때가. 한권의 소설이, 돈과 힘의 음험한 기운에 주눅들어 아등바등하던 소시민의 일상을 시리도록 투명하게 일깨우던 그 때가. 「침묵」의 70년대와 「치욕」의 80년대. 그 암울하던 시절에 솟구치고, 또 솟구쳐 저 멀리 역사의 지평 위에 내일의 희망을 소리쳤던 「그때 그 소설」들. 그때 그 소설들이 한 궤에 묶여 나왔다. 문학과지성사의 「소설 명작선」. 문지가 20여년 동안 축적해 온 소설문학의 보고를 한자리에 추려 새로 냈다. 그 뜨거웠던 이념에의 열정도, 가열찬 투쟁의 회한마저도 세기말의 촛농 속에 함께 녹아들어 흐느적대는 지금, 이들 소설에서 부릅 뜬, 시대의 작가정신을 만날 수 있다. 문지 명작선은 「분단」에서 「광주」까지, 근대화에서 후기 산업사회에 이르기까지, 우리 현대사의 명암과 굴곡에 온몸을 적신, 뜨거운 숨결로 가득하다. 형식면에서도 전후 한국문학의 새로운 양식과 실험적인 문체가, 꿈틀거리는 생명력으로 요동친다. 그래선지 독자들의 반응이 뜨겁기만 하다. 전후 최대의 화제작 「광장」.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으로 시작되는 소설. 당시 장용학 손창섭 김동리만 손꼽히던 문단의 타성과 관성(慣性)에 제동을 건 그 소설. 이미 5쇄에 들어갔다. 소문난 작품 「당신들의 천국」(이청준)과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조세희)도 비슷하다. 놀라운 것은 중편연작 「낯선 시간 속으로」(이인성)와 장편 「죽음의 한 연구」(박상륭)가 출간되자마자 재판에 들어간 것. 두 작품은 외국어보다 더 생소한 소설문법과 「참을 수 없는」 난해함으로 독자들의 인내력을 시험하던 바로 그 소설들. 뿐인가. 오정희의 창작집 「불의 강」도 독자들을 끌어당기고 있다. 섬뜩하다 못해 비리고 음습하기까지 한 그의 소설언어. 이제, 세기말에 이르러 독자들과 거리를 좁힌 것일까. 그 이물감, 그 생경함, 그 서걱거림이라니…. 오정희 이후에 그 어느 여성작가도 그의 언어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하다는 주장이 그럴듯하게도 느껴진다. 숨막힐 듯 정밀한 묘사로, 「아는 만큼만 읽힌다」는 서정인의 창작집 「강」도 재판을 찍었다. 끝내 용서할 수 없었던 「광주」. 그러나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죄의식과 부끄러움을, 뼛속이 아려오는 절제된 언어로 담은 「아버지의 땅」(임철우). 농촌소설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고야 만 「관촌수필」(이문구). 그리고 강건한 문체로 도시 리얼리즘 문학의 한 장을 연 「아홉켤레 구두로 남은 사내」(윤흥길). 이들 소설집도 작가와 작품의 지명도에 힘입어 3, 4쇄에 들어갔다. 무수히 쏟아지는 신간서적, 더러는 분리수거돼야 할 쓰레기에 치여, 서점 진열대에서 밀려나 창고에 처박히기 일쑤인 우리시대의 양서(良書)들. 그야말로 「양화(量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세태여서 일까. 출판계는 문지 명작선의 부상을 반긴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속도」에 감염된 현대인들에게 「인스턴트 위안」을 던지는 「∼가지」류(類)들이 서점가를 휩쓸고 있다』며 『문지 명작선은 생명력 있는 문학작품의 현재적 복원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말했다. 〈이기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