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어느 누구도 맞서지 못하던 태종 이방원에게 눈을 부릅뜨고 일갈하는 유일한 인물 이숙번. 『용상에 오르시니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어서 이리 마음을 놓고 계시옵니까. 이런 식으로 성군이 되고자 하시옵니까』 『네 이 놈』 태종이 책상을 뒤엎으며 노발대발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옆에 앉아있던 도승지가 『무슨 망발이냐』고 뜯어말리지만 되레 『시끄러!』 하고 소리를 지르며 임금을 노려본다. 상왕복귀를 꾀하는 이성계의 무리들에 칼을 들라는 이숙번의 집요한 설득에 지고 만 태종은 이렇게 비장하게 선언한다. 『숙명이라면 이 사실을 받아들이겠다. 나는 어차피 피의 저주를 받은 사람. 허나 너도 잘 기억해둬라. 역사는 이 시대에 아비에게 칼을 든 폭군 이방원이 있었고 그 옆에는 항상 무뢰한인 이숙번이 있었음을 기억할 것이야』 태종에게 이숙번이 어떠한 사람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처럼 KBS1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탤런트 선동혁(42)이 그려내는 이숙번은 「미친 듯이 망령됐다」는 역사속 기록과는 사뭇 다르다. 다혈질이면서 오만하지만 상황을 꿰뚫어보는 통찰력과 치밀함이 있는, 이중성이 두드러진 인물이다. 보스를 위해 칼에 피 묻히기를 마다하지 않고 온갖 충성을 다하나 맹목적인 복종은 아니다.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는 배짱도 두둑하다. 선동혁은 이숙번 역으로 뒤늦게 빛을 본 「신인 아닌 신인」. 그러나 17년간 연극무대와 TV에서 갈고닦은 내공이 만만치 않다. 극 초반부에는 김재형PD로부터 『눈빛이 약하다』 『대사가 너무 리듬을 탄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요즘 들어서는 이숙번의 지적이면서도 담대한 양면을 잘 그려내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자신의 연기가 「지나치게 에너지를 많이 낭비하는 스타일인 것 같아서」 마음에 안든다고 한다.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서도 힘을 보여주는 좀 더 고급스러운 스타일이 있을텐데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아 고민』이다. 이숙번은 승승장구 끝에 교만해져 결국은 이방원에게 버림받는 비운의 정치인이다. 드라마에서 곧 있을 조사위의 난을 평정한 뒤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을 꿈꾸는 이숙번의 야심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할 예정. 선동혁의 선굵은 연기를 좋아하는 시청자라면 충직한 심복이 어떤 식으로 변해가서 결국 토사구팽을 당하게 되는지 지켜보는 것도 새로운 즐거움이 될 듯하다. 흥이 나면 내리 3시간동안 판소리 춘향가를 연창할 정도의 창 실력을 갖추고 있는 그는 12월 발라드풍 트로트 「인생」 등 가요를 부른 음반을 낼 예정이다. 〈김희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