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의 동문밖 영통사(靈通寺) 앞을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가면 기암이 병풍처럼 두르고 수석 아름다운 곳에 물이 모여 맑은 못을 이루었다. 봄이면 산에 진달래가 붉게 타올라 못까지 물들기에 화담(花潭)이라 일컬었다. 바로 이곳에서 조선중기 성리학의 걸출한 봉우리를 이룬 화담 서경덕(徐敬德·1489∼1546)이 은거하며 심원한 학문과 고결한 인품을 연마하였다. 화담의 생애에 관해 설화는 넘치지만 남아있는 기록은 빈약하다. 그는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여러날 끼니조차 거르는 빈곤 속에 오직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31세 때 현량과(賢良科)에 응시하도록 천거받았지만 응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벼슬길에 마음을 버렸지만 벼슬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뒤늦게 43세에 소과급제로 그쳤다. 명성이 널리 알려진 52세 때 김안국(金安國)의 천거를 받았지만 그가 58세로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겨우 참봉벼슬이 한번 제수되었을 뿐이다. 스승 없이 독학하였기에 화담의 학풍은 시작부터 남달랐다. 18세 때 「대학」을 읽다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방법에 분발하여 사물의 이름을 하나씩 벽에 써 붙여두고 종일토록 무릎꿇고 앉아 침식도 잊은채 사색을 거듭하길 3년이나 계속하였다. 각고의 노력으로 깨달아가는 외로운 길이었다. 그후 경전과 「성리대전」을 읽으며 자신의 깨달음을 확인해갔다. 이러한 화담의 궁리공부는 그의 학문적 관심을 도덕적 문제보다 자연철학적 방향으로 이끌어갔다. 그 결과 「주역」의 상수(象數)에 정통하였으며 주자의 의리(義理)보다 수리(數理) 기학(氣學)에 깊이 파고들었다. 당시 개성에서는 화담이 기(氣)철학을 주창했고 경주에서는 이언적(李彦迪)이 이(理)철학을 주창하여, 두 고도(古都)에서 양극적 성리설이 정립되었다. 그것은 조선성리학의 수준을 상승적으로 끌어올렸으며 한편으론 뒤이어 영남의 퇴계(退溪)와 기호의 율곡(栗谷)으로 대표되는 조선성리학의 양대 학파를 열어주는 「선하(先河)」가 되었던 것이다. 58세 때 겨울, 병이 위급하자 그는 병석에서 성리설에 관해 「원리기(原理氣)」 「태허설(太虛說)」 등 4편의 짧은 글을 지어 제자들에게 들려주면서 『이 논설이 비록 말은 졸렬하나 여러 성현이 다 전하지 못한 자리를 본 것이다.…후학에게 전하여 중국과 오랑캐에 두루 알려 우리나라에도 학자가 나왔음을 알게 하라』고 당부하였다. 그만큼 이 글들이 자신의 독창적 견해임을 자부했던 것이다. 율곡도 화담은 「스스로 깨달은」 맛이 있고 퇴계는 「본받은」 맛이 있다 하여 화담의 창의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의 성리설은 우주의 근원과 현상세계를 모두 「하나의 기(일기·一氣)」로 파악하였다. 그는 이 하나의 기를 「태허(太虛·우주 생성 이전의 상태)」 개념으로 표출하고 「선천(先天)」과 일치시켰으며 「태극」을 그 속에 흡수하였다. 모든 현상세계가 생성되어 나오는 동정(動靜) 생극(生克)의 계기는 하나의 태허 속에 내포되어 있고 그 계기는 「기」가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라 해석한다. 그는 「이」를 「기」의 위에 두기를 거부하고 「기」가 생성작용하는 「후천(後天)」의 현상세계에서 그 정당성을 잃지 않게 하는 자기통제력으로 파악하여 「이」를 「기」의 한 속성으로 한정했다. 그가 「줄없는 거문고」를 위한 계명(무현금명·無絃琴銘)과 「줄있는 거문고」를 위한 계명(금명·琴銘)을 나란히 지었던 것도 바로 소리없는 가운데 소리를 듣는 음악의 본체와 소리 속에서 음률의 조화를 즐기는 음악의 응용으로, 태허―선천과 동정―후천의 구조로 이루어진 그의 기철학적 세계를 생생하게 암시해주는 것이다. 그는 「사려도 행위도 없는(무사무위·無思無爲)」 자리에 「머물 것(지·止)」을 강조하고 그 방법으로 「경(敬)」의 수양법을 제시하였다. 경 공부가 오래되어 고요함으로 활동을 제어하여 머무름에 집착하지 않게 된 다음에야 사려도 행위도 없는 자리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정(靜)」은 마치 태풍의 중심처럼 고요하지만 모든 활동을 제어하는 중추라야 하며 사려도 행위도 없는 경지는 모든 사려와 행위를 바르게 통제할 수 있는 기준이라야 한다. 화담은 예법의 원리를 「인정(人情)에 근거하여 예문을 규정하고 예문에 근거하여 인정을 검속하는 것」이라 제시하고 옛 성인이 인정에 근거해 제정한 예문인 옛 예법(古禮)을 준수하도록 요구했다. 이에 따라 옛 예법과 인정에 맞지 않는 국상(國喪)의 상법제도를 바로잡을 것을 주장하였다. 화담은 임종에 앞서 「죽고 사는 이치를 안 지가 이미 오래이니 생각이 편안하다」하여 죽음을 제 집으로 돌아가듯 의연하게 맞았다. 그는 인간이 나고 죽는 것은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현상일 뿐, 맑고 허허로운 「기」의 본체는 시작도 끝도 없이 본래 하나라 하였다. 이미 그의 평생 학문이 태허 속에 푹 젖었으니 죽음과 삶의 분별에 흔들릴 까닭도 없었으리라. 마지막으로 화담은 시자(侍者)에게 명하여 화담 못에 나가 자신을 목욕시키게 하고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태허로 돌아가는 몸을 정결히 한 것인가. 화담의 제자 이구(李球) 박순(朴淳)은 퇴계 율곡과 논쟁을 벌였고 이를 통해 화담의 학풍은 당시 성리학의 주요 쟁점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화담의 학맥은 그후 흩어져 학파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이」철학의 정통주의가 강화하면서 「기」철학이 숨쉴 공간이 너무 좁아졌거니와 퇴계 율곡 두 학통의 흡인력이 너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대교수·종교학) ▼약력 △서울대 종교학과 졸업 △성균관대대학원 박사학위 △성균관대교수 역임 △저서 「한국실학사상 연구」 「한국근대사상의 도전」 「유학사상의 이해」 등 (화가·동덕여대교수) ▼약력 △서울대 미대 졸업(동양화 전공) △캐나다현대작가초대전 등 국내외 전시회 및 개인전 3회 △신인예술상 수상(수석) △국전 문공부장관상 및 특선 5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 역임